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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우 12년만 작심발언, 개인적 응어리 넘어 공론화 위해 낸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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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우 12년만 작심발언, 개인적 응어리 넘어 공론화 위해 낸 용기
  • 김의겸 기자
  • 승인 2021.02.19 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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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큐) 김의겸 기자] 프로배구 남자부 간판 공격수 박철우(36·한국전력)가 12년 전 자신을 폭행한 이상열(56) KB손해보험 감독을 공개 비판했다. 이 감독이 버젓이 코트로 돌아온 뒤 불편함을 느꼈다며 여전히 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고 토로했다. 박철우의 개인적인 응어리도 있겠지만 그가 엘리트체육과 아마추어를 가리지 않고 스포츠계에 만연한 지도자 폭력 행태를 근절하고자 낸 용기이기도 하다.

최근 이재영·다영(흥국생명) 쌍둥이 자매와 송명근 심경섭(이상 OK금융그룹) 등 V리그 스타들의 학폭(학교폭력) 전력이 밝혀지면서 프로배구가 논란의 중심에 섰다. 박철우는 나아가 더 이상 체육계 폭력 실태에 대한 공론화를 미뤄서는 안 된다고 힘줬다.

박철우는 18일 경기 안산 상록수체육관에서 열린 OK금융그룹과 경기에서 세트스코어 3-1 승리를 이끈 뒤 취재진과 인터뷰를 자청했다. 통상 취재진이 승리팀에서 1~2명을 수훈선수로 선정해 기자회견을 진행하는데, 이례적으로 선수가 먼저 요구한 것이다.

현장에 있던 취재진에 따르면 그는 "오늘 정말 이겨서 꼭 인터뷰실을 오고 싶었다"며 "최근 이상열 감독님 인터뷰를 보고 충격이 커서 이렇게 나서게 됐다"고 운을 뗐다.

남자배구를 대표하는 스타 박철우가 이상열 KB손해보험 감독을 공개 비판했다. [사진=KOVO 제공]

박철우는 경기 앞서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정말 피꺼솟이네.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느낌이 이런 것인가"라는 글을 남겼다. 12년 전 국가대표팀에서 이상열 감독에게 폭행당한 그다. 전날 이 감독이 배구계에 불거진 학폭 논란에 대한 입장을 밝힌 직후였기 때문에 사실상 이 감독을 겨냥한 게시물이었다.

이상열 감독은 전날 우리카드와 맞대결 앞서 "폭력 가해자가 되면 분명히 대가를 치르게 된다고 후배들에게 충고했다"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역시 떳떳하지 못한 과거가 있기 때문이다. 2009년 남자배구 국가대표팀 코치로 재직하던 때 태릉선수촌에서 박철우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구타한 사실이 있다. 당시 박철우는 기자회견을 열고 이를 폭로했고 한선수(대한항공), 문성민(현대캐피탈), 김요한 KBSN스포츠 배구 해설위원 등이 이를 증언했다. 이 감독은 이런 사실을 재차 인정하고 가해자로서 겪은 자신의 경험을 담담히 전하며 '선수들에게 타산지석 삼을 것을 일렀다'고 밝혔다.

이 사건으로 이 감독은 2년간 자격정지 징계를 받았다가 국가대표로 국위를 선양한 점이 인정돼 2011년 한국배구연맹(KOVO) 경기 운영위원으로 배구계에 돌아왔다. 이후 대학 지도자, 해설위원을 거쳐 지난해 여름 KB손해보험 지휘봉을 잡으며 프로 사령탑으로 데뷔했다.

18일 박철우는 이상열 감독의 '학폭' 이슈 관련 인터뷰를 확인한 뒤 SNS에 이같은 글을 남겼다. [사진=박철우 인스타그램 캡처]

이상열 감독은 구타 사건 후 경험을 토대로 "어떤 일이든 대가가 있을 것이다. 인과응보가 있더라"라며 "저는 그래서 선수들에게 사죄하는 느낌으로 대한다. 조금 더 배구계 선배로서 모범적인 모습을 보이려고 애쓰고 있다"는 말로 반성을 이어오고 있다고 알렸다.

폭력이 피해자에게 씻기 힘든 상처를 주는 것은 물론 가해자에게도 큰 폐해를 남긴다는 취지의 발언이었지만, 박철우는 불편함을 느꼈다.

박철우는 먼저 시즌 중 이런 얘기를 꺼내 KB손해보험 선수단에 동요를 일으키게 돼 미안하다며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박철우는 “정말 이런 식으로 말하고 싶진 않았다. (나에 대한) 좋지 않은 이미지가 생길 지도 모른다. 앞으로 내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면 돌파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 용기를 냈다”며 “참고 조용히 지내고 싶었지만, 어제 인터뷰 기사를 보니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어 “사과를 바라는 건 아니다. 당시 사건 때 고소를 취하하기도 했고, 반성하고 좋은 지도자가 되길 바랐다. 하지만 이후에도 선수들을 겁주거나 주먹으로 때리지 못하니 모자로 때렸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이상열 감독은 올 시즌부터 KB손해보험을 지휘하고 있다. [사진=스포츠Q(큐) DB]

이어 “유명하신 분이다. 아마추어 시절 그 분이 지도하는 팀이 0-2로 지고 있으면 얼굴이 붉어진 채 (라커룸에서) 나오는 선수들도 많았다. 기절한 선수들도 있고, 고막이 나간 선수들도 있다. 다 내 친구들이자 동기들이었다”며 “그런데 '한 번의 실수, 한 번의 감정에 치우쳐 폭행을 저질렀다'고 하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강조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누군가는 ‘맞을 짓을 해서 맞은 거라고’ 말하더라. 그럼 정말 우리는 맞을 짓을 해서 맞은 건가. 어렸을 때 부모님 앞에서도 맞을 때도 있었다”며 “하지만 정도라는 게 있다. 배구하는 선수들 중에서 안 맞은 선수를 찾기는 힘들 것이다. 그런데 인터뷰에서 그 분이 ‘한 번 해 봤다’는 식으로 말하는 건 정말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철우는 “배구가 좋지 않은 소식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는 게 정말 싫다. 하지만 뿌리를 뽑아야 한다. 이제는 정말 바뀌어야 한다”며 “사과를 받고 싶어 인터뷰를 한 게 아니다. 그 분을 굳이 보고 싶지도 않다. 원하는 게 있는 것도 아니다. 처벌도 원하질 않는다”고 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그 분이 변하셨고 날 만나 사과하셨다면 내가 이런 감정이 남아 있었을까란 생각이 든다. 강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왔다. 숨지 않고 강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인터뷰를 했다”는 말을 남겼다.

지난 2009년 이상열 감독에게 폭행을 당한 뒤 기자회견을 열었던 박철우다. [사진=연합뉴스]

이상열 감독은 박철우의 SNS 글이 화제가 되자 이날 한국전력의 경기가 열리기 전 국민일보와 인터뷰를 통해 사죄의 뜻을 재차 전하며 용서를 구했다. 

그는 매체를 통해 “관련 질문을 받게 돼 후배들에게 폭력은 잘못됐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한 말이었지, 박철우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니었다. 100% 제 잘못이었고 평생 (죄를) 안고 갈 각오를 하고 있다"며 "피해자 입장에서는 죽을 때까지 용서가 안 되겠지만, 박철우 선수가 너그럽게 아량을 배풀어 준다면 더 열심히 배구계를 위해서 헌신하고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박철우가 구타 사건 후 선수와 후배에게 사죄의 느낌으로 행동한다던 이 감독 발언을 정면 반박한 셈이다. 파장이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배구계에서 촉발된 체육계 폭력 근절 움직임은 문화체육관광부 등 관련 부처 차원으로 확대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5일 황희 문체부 장관 임명식에서 스포츠 폭력 근절을 강조하기도 했다. 박철우가 낸 용기가 체육계 폭력을 뿌리뽑는 계기가 될 수 있을까. 체육계 대처에 시선이 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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