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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녘 하늘에 지는 태양이 가장 붉다, 이현일·조호성의 아름다운 아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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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녘 하늘에 지는 태양이 가장 붉다, 이현일·조호성의 아름다운 아듀
  • 박상현 기자
  • 승인 2014.09.24 11: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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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게임 재도전 레전드들의 은퇴...이현일, 12년만에 단체전 금메달 주역...불혹 조호성도 은메달 '피날레'

[인천=스포츠Q 박상현 기자] 아시안게임에서 시작해 아시안게임에서 끝냈다. 10년 또는 20년 넘게 대표 선수로 활약했던 왕년의 에이스들이 아시안게임에서 화려하게 데뷔한 뒤 아시안게임에서 자신의 현역생활을 아름답게 마무리했다.

더욱이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가 종목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 아시아드 무대에 복귀해 특별한 재도전을 했던 레전드들이기에 더욱 특별한 피날레가 됐다.

2000년대 배드민턴 '에이스' 이현일(34·MG새마을금고)은 23일 계양체육관에서 열린 인천 아시안게임 남자 배드민턴 단체전 중국과 결승에서 2-2로 팽팽하던 다섯번째 게임에 나서 가오후안을 2-0(21-14 21-18)으로 꺾고 12년만에 한국 배드민턴 남자 단체전 금메달의 주역이 됐다.

또 같은 날 조호성(40·서울시청)은 인천국제벨로드롬에서 열린 사이클 남자 옴니엄에서 은메달을 따내며 자신의 국제대회 은퇴경기를 화려하게 마쳤다. 목표로했던 금메달은 아니었지만 메달 획득만으로도 그는 한국 사이클의 에이스로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이현일과 조호성은 모두 자신의 첫 국제종합대회인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로 화려한 데뷔전을 가졌고 중간에 은퇴하거나 대표팀에서 떠나 있었다가 다시 대표팀으로 돌아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현일은 22세이던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을 통해 첫 국제종합대회에 데뷔, 금메달을 따낸 뒤 한국 배드민턴 에이스로 자리했지만 대표팀을 드나들었다. 그가 2002년 부산 대회부터 2014년 인천 대회까지 모두 네차례 아시안게임에 출전하면서 금메달 2개와 은메달 3개, 동메달 1개를 거둬들이며 모두 6개의 메달을 땄다.

또 조호성은 약관의 나이에 출전한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차지하며 한국 사이클의 간판으로 평가받았으나 잠시 경륜으로 '외도'를 하다가 다시 대표팀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조호성은 1994년 히로시마 대회부터 이번 대회까지 도하 대회를 제외한 다섯차례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5개, 은메달 2개 등 7개를 획득했다.

혈기왕성한 20대부터 시작해 자신의 종목에서 에이스로 활약했던 그들은 인천 아시안게임을 통해 재도전에 나섰고 이날 화려하고 아름답게 현역을 마무리했다.

마치 서쪽 하늘에 지는 태양이 가장 붉은 것처럼.

◆ 2000년대 에이스 이현일의 귀환, 셔틀콕 레전드의 완벽한 마무리

이현일은 서울체고 재학중이던 1997년 최연소 국가대표로 각종 국제오픈에 참가하는 등 차세대 배드민턴 단식 에이스로 평가받았다.

그는 부산 아시안게임이 열리던 해인 2002년에 세계랭킹 8위까지 도약했고 그해 4월에는 당시 세계랭킹 1위 시아순제(중국)를 꺾고 일본 오픈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첫 종합 국제대회인 부산 아시안게임은 한국 배드민턴의 에이스를 약속하는 무대였다.

당시 한국은 남자 단체전에서 일본,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를 차례로 꺾었는데 8강전과 4강전, 결승전을 치르는 동안 단 한 게임만 내주는 강력함을 보여줬다. 이 가운데 이현일은 단식 3경기를 모두 2-0으로 꺾는 위력을 과시했다.

다만 개인전 남자단식이 아쉬웠다. 예선 2라운드를 2-0으로 가볍게 꺾었던 이현일은 당시 4번 시드를 받았던 옹충한(말레이시아)를 상대로 첫 세트를 내주고도 내리 두 세트를 따내는 뒷심을 보여주며 4강까지 올랐다.

이어 1번 시드였던 시아순제를 꺾고 준결승에 진출했던 헨드라완(인도네시아)의 돌풍을 1세트에 3점, 2세트에 4점만 내주고 2-0으로 가볍게 꺾고 결승에 올랐다. 하지만 결승에서 타우피크 히다야트(인도네시아)에 0-2로 지면서 아쉽게 2관왕에 실패했다.

분명 부산 아시안게임은 그에게 날개를 달아준 대회였고 2004년 2월 한국 선수로는 최초로 세계랭킹 1위까지 오르며 한국 배드민턴 남자단식의 영원한 에이스로 군림했다.

그러나 정작 올림픽에서는 인연이 없었다. 금메달 후보로 꼽혔던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는 태국 선수에 져 2라운드 탈락했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과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는 두차례나 3~4위전에서 중국 선수에 밀려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2000년대 중반부터는 대표팀을 수시로 들락날락하는 모습도 있었다. 2007년 코리아오픈 1회전에서 패하자 스스로 태극마크를 반납했던 그는 4개월만에 복귀해 치른 베이징 올림픽에서 4위에 올랐고 이후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겠다며 다시 대표팀에서 은퇴했다.

2010년 다시 한번 대표팀에 발탁된 그는 런던 올림픽을 치른 뒤 실업팀 생활에 전념하기 위해 대표팀을 떠났지만 인천 아시안게임 단체전 금메달을 위해 전격 발탁됐다.

한국 남자 배드민턴 대표팀에서 '이현일 카드'가 절실했던 것은 세계랭킹 1위 이용대(26·삼성전기)-유연성(28·국군체육부대) 조 등 복식에서는 우수한 인재가 많으면서도 정작 단식에서는 열세를 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단체전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3차례 치러지는 단식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득춘 감독도 "노장이지만 3단식에 설 수 있는 선수는 이현일 외엔 없었다"며 "1년 전부터 복귀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털어놨다.

그리고 노림수는 적중했다. '큰 형님'은 대표팀에서도 후배들을 잘 이끌었을 뿐 아니라 위기에서 한국을 구해내고 금메달을 따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일본과 8강전에서 첫 경기 단식에 나선 손완호(26·국군체육부대)와 두번째 경기 복식의 이용대-유연성 조가 내리 이겨 기선을 제압했으면서도 세번째와 네번째 경기를 내리 내주면서 수세에 몰렸다.

하지만 이현일은 우에다 다쿠마를 맞아 첫 세트를 14-21로 잃는 불리함 속에서도 2세트를 21-18로 따낸 뒤 3세트를 21-9로 이겨 한국을 4강에 진출시켰다.

중국과 결승전도 일본전처럼 흘러갔다. 손완호와 이용대-유연성 조가 내리 두 게임을 따냈으면서도 3, 4게임을 내리 져 위기에 몰렸지만 이현일이 나서 부산 대회 이후 12년만에 금메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국의 금메달을 확정짓는 점수를 따내자 이현일은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성을 질렀다. 후배들도 대기석에서 기립박수로 경의를 표한 뒤 코트로 뛰어나가 그를 헹가래쳤다. 한국 배드민턴의 에이스에게 맞는 완벽한 마무리였다.

◆ 히로시마서 출발한 조호성, 방콕·부산·광저우 거쳐 인천서 화려한 피날레

이현일이 노장이라고는 하지만 조호성보다는 한참 까마득한 후배다. 이현일은 30대 중반이지만 조호성은 어느덧 불혹의 나이가 됐다.

운동선수가 불혹이 될 때까지 현역에서 뛴다는 것은 여간 몸 관리를 철저히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특히 스피드를 다투는 기록 경기라면 더더욱 그렇다. 구기종목 같은 경우는 노련한 경기 운영 능력에 따라 부족한 스피드를 만회할 수 있지만 기록 경기는 선수의 운동능력에 따라 결정된다.

그렇기에 사이클에서 40세가 될 때까지 현역으로 뛴다는 것은 그만큼 조호성이 몸관리가 철저하다는 뜻이다.

조호성 역시 한국 사이클의 불세출 에이스다. 부천고 재학 중이던 1991년 국가대표 상비군으로 출발한 그는 1993년 12월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대표팀에 포함된 뒤 고작 약관의 나이에 출전한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40km 포인트레이스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자신의 첫 국제종합대회 데뷔전에서 금메달을 딴 조호성은 1998년 방콕 대회에서는 2연패에 실패했지만 2002년 부산 대회에서 포인트레이스와 매디슨에서 모두 금메달을 따내며 2관왕에 올랐다.

그에게도 시련과 아픔이 있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사이클을 제대로 봐주는 사람이 없었다. 비인기종목의 설움에 회의를 느낀 그는 프로 경륜선수로 뛰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사이클로 복귀했다. 사이클이 비인기종목이 된 것이 마치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았고 자신이 있어야만 사이클이 조금이라도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는 환희와 아픔을 함께 맛보기도 했다. 후배 장선재(30·대한지적공사)와 출전한 팀 추월 경기에서는  금메달을 일궈냈지만 자신의 주종목인 포인트레이스에서는 결승전 중반 속도를 올리다가 사고로 넘어지는 바람에 다리 근육이 굳어 9위로 밀려나기도 했다.

런던 올림픽까지 치른 그는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주위 만류가 있었지만 고향(부천 오정동) 근처에서 열리는 대회였기에 꼭 참가하고 싶었다. 몸 상태도 좋았다. 그리고 자신이 처음 금메달을 따냈던 40km 포인트레이스 종목이 포함되어 있는 옴니엄 종목에 출전했다.

공교롭게도 조호성은 중간 순위 선두를 달리다가 가장 배점이 높은 40km 포인트레이스를 치르면서 2위로 내려앉았다. 원래 중장거리 경험이 많고 상대적으로 단거리가 약해 단거리 스피드를 끌어올리는 쪽으로 훈련을 진행해왔는데 공교롭게도 자신의 주종목인 40km 포인트레이스에서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금메달을 따내지 못한 아쉬움에 눈물을 훔쳤지만 27년 동안 페달만 밟았던 그에 대한 찬사는 끊이지 않는다.

조호성은 경기가 끝난 뒤 공식 인터뷰에서 "27년 가운데 오늘이 가장 아쉽다. 앞으로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는 것이 가장 슬프다"며 "그동안 가족들에게 항상 받기만 했는데 2~3일 정도만이라도 아이들에게 음식도 해주고 아내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보통 가족들처럼 소소한 것을 해보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tankpark@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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