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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달보다 빛난 태극 레슬러의 부상투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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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달보다 빛난 태극 레슬러의 부상투혼
  • 이세영 기자
  • 승인 2014.10.02 10: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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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가 빠져도 이가 부러져도 꺾이지 않은 아시안게임 레슬링 전사의 도전

[스포츠Q 이세영 기자] 14년 전 시드니 올림픽에서 갈비뼈 부상을 안고 결승전에 나서 은메달을 땄던 김인섭(41·삼성생명 코치)을 기억하는가.

당시 김인섭은 왼쪽 갈비뼈와 손가락 부상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투혼을 발휘해 자신의 올림픽 첫 메달을 일궜다.

그리고 14년 뒤 인천에서 또 한 번 태극 레슬러들의 온몸을 내던진 투혼들이 펼쳐졌다. 상상을 초월하는 정신력을 발휘한 레슬러들에게 하늘도 감동했을까.

한국 레슬링이 4년 전 광저우 대회에서 ‘노골드’ 굴욕을 딛고 힘찬 도약을 알렸다.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끌어올린 분위기를 이어가면서 2년 뒤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희망을 이어갈 수 있게 됐다.

한국 남자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선수들은 1일 인천 도원체육관에서 열린 2014 인천 아시안게임 레슬링 마지막날 경기에서 금메달 2개와 은메달 2개를 획득했다.

이번 대회에서 금메달 3개, 은메달 3개, 동메달 6개를 획득한 한국 레슬링은 광저우 대회 때 은메달 3개, 동메달 6개에 그쳤던 것을 단숨에 뛰어넘고 레슬링 강국의 위치로 되돌아왔다.

아시안게임에서 8년 만에 금맥을 캤다는 것도 의미 있지만 부상을 안고 출전한 선수들이 끝까지 투혼을 발휘하며 메달을 획득한 장면은 한국 레슬링 선수들이 엄청난 정신력으로 무장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남자 그레코로만형 85㎏에서 은메달을 딴 이세열(24·조폐공사)은 습관성 어깨 탈구 속에서도 결승까지 진출해 상대와 맞섰다.

이세열은 대회를 1주일 앞두고 막바지 훈련을 하는 과정에서 스파링하던 도중 훈련 도구에 부딪혀 어깨가 빠졌다.

어린 시절부터 겪었던 습관성 탈구가 하필 아시안게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이세열은 4년 전 광저우 대회에서 은메달에 머문 아쉬움을 금빛으로 바꾸려 했기에 주변의 만류에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어깨 관절을 다시 맞춘 뒤 진통제를 맞고 테이핑을 하며 출전을 강행했다.

다행히 아자트 베이셰브코프(키르기스스탄)와 겨룬 준결승까지는 아무런 탈이 없었다. 조금 불편하기는 했지만 이세열은 8강에서 큰 무리 없이 기술을 걸며 상대의 실격패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4강에서 올 것이 오고 말았다.

3-0으로 앞선 상황에서 어깨가 빠지고 만 것이다. 이세열이 오른쪽 어깨의 고통을 호소하며 매트를 뒹굴자 의료진이 재빨리 올라와 응급처치를 했다.

앞서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었다. 이세열은 어깨 관절을 맞춘 후 이미 깁스처럼 감겨진 어깨에 다시 테이핑을 했다. 오른팔을 거의 들 수 없을 정도로 심한 부상이었지만 이세열의 투지가 워낙 강했다.

남은 시간을 잘 버틴 이세열은 마침내 아시안게임 2연속 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결승에서 만난 루스탐 아살카로프(우즈베키스탄)는 투혼만으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이세열은 6분을 채 버티지 못하고 테크니컬 폴로 패했다.

경기 후 공식 기자회견에서 이세열은 “대회를 앞두고 어깨가 빠졌던 것은 어느 정도 회복이 됐었는데 4강에서 다시 빠진 것이 결승전에 큰 영향을 줬다”며 “(어깨가 빠질 것이라)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아쉽다”고 씁쓸해했다.

자유형 74㎏급에서 동메달을 딴 이상규(28·부천시청)도 부상을 이겨내고 값진 성과를 거뒀다.

올해 초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단 이상규에게 이번 아시안게임은 레슬러로는 다소 많은 나이에 출전한 첫 메이저 대회였다.

첫 메이저대회는 녹록지 않았다.

이상규는 8강에서 만난 중국의 장청야오와 경기 도중 상대에게 태클을 들어가는 도중 발에 얼굴을 차여 의치로 해 넣은 앞니 2개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다.

입에서 피가 나는 상황이었지만 이상규는 끝까지 최선을 다했고, 결국 2피리어드에서 4점을 보태 10-6으로 이겼다.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 이상규는 준결승전에서 힘 한 번 못 쓰고 패하면서 결승진출에 실패했다.

하지만 동메달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동메달 결정전에서 통증을 안고 무함마드 아사드 부트(파키스탄)와 맞선 이상규는 6-2 승리를 거두며 메달을 손에 넣었다.

경기 후 이상규는 “이가 부러진 뒤 진통제를 맞고 계속 경기에 나갔다”며 “아들과 가족 생각을 하며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지난달 30일 그레코로만형 71㎏급에서 금메달을 땄던 정지현(31·울산남구청)도 부상 투혼을 발휘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그가 결승에 오르기 전 4강에서 만난 상대는 2010년 광저우 대회 금메달리스트였던 압드발리 사에이드(이란)였다.

천신만고 끝에 역전승을 거둔 정지현은 승리의 대가를 부상으로 치러야 했다. 상대의 머리와 수차례 부딪힌 그의 오른쪽 눈두덩이는 피멍이 들고 부었다.

급하게 의무실로 행해 얼음찜질로 눈이 붓는 것을 막아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한쪽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결승전을 치러야 했다.

하지만 정지현은 오히려 준결승보다 수월하게 경기를 풀어나갔고 마침내 금메달을 따내며 지난 10년간 오르지 못한 정상에 다시 서는 기쁨을 누렸다. 강한 정신력과 투혼으로 빚어낸 금메달이었다.

태권도, 유도, 복싱 등 같은 투기종목 중에서도 훈련 강도가 높은 것으로 유명한 레슬링은 이번 대회를 앞두고 코칭스태프와 선수단 전원이 지옥훈련을 자청하며 체력과 정신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안한봉 대표팀 감독은 “사점(Dead point)훈련을 하며 정신력을 키웠다. 선수들이 ‘어떤 상대와 만나도 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있다”고 말했다.

물론 투혼과 정신력으로만 딴 메달은 아니지만 '정신 무장'은 침체됐던 한국 레슬링이 부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소기의 목표를 달성한 태극 레슬러들은 2년 뒤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더 큰 도약을 노린다.

syl015@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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