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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유럽 정복한 '동양의 종달새' 임선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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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유럽 정복한 '동양의 종달새' 임선혜
  • 용원중 기자
  • 승인 2014.10.13 10: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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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 글 용원중기자·사진 아트앤아티스트] 유럽 고음악계 최정상의 프라마돈나 임선혜(38)가 프랑스 고음악 전문 레이블 아르모니아 문디를 통해 ‘오르페우스- 이탈리아와 프랑스 칸타타’를 발매했다. 동양인으로서는 처음이다. 음반이 발매된 지난 10일 오후 서울 압구정동 풍월당에서 눈웃음이 매력적인 '디바'를 만났다.

 

◆ 세계적 고음악 레이블 문디 통해 첫 독집 ‘오르페우스’ 발매

그리스 신화 속 오르페우스는 그가 노래하면 나무와 바위도 눈물을 흘리고 사나운 맹수도 온순해졌다는 최초의 음악가다.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데리러 저승세계로 내려갔지만 끝내 아내를 찾지 못하고 실의에 빠져 비극적 죽음을 맞은 그의 이야기는 과거부터 수많은 작곡가를 사로잡았다. 가장 오래된 오페라인 페리의 ‘에우리디체’(1600년)와 근대 오페라의 효시로 꼽히는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1607년)도 오르페우스 신화를 소재로 하고 있다.

오르페우스는 17∼18세기 바로크 시대에 유행했던 성악곡인 칸타타의 대가들에게도 인기였는데, 이때 프랑스와 이탈리아 작곡가 4명이 만든 각기 다른 오르페우스가 이번에 임선혜의 목소리를 통해 음반으로 나오게 됐다. 베를린 고음악 아카데미가 연주를 맡았다. 1999년 유럽 무대에 데뷔한 지 15년 만에 내놓는 첫 독집 음반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독집이라(웃음) 개인적으로 정말 큰 영광이다. 문디에서 나왔다는데 큰 자부심을 느낀다. 아직까지 동양의 성악가에게 독집 음반을 내준 적이 없는 음반사에서 출시하게 된 점도 영광스럽다. 그동안 내가 지켜온 음악적 자존심 담은 음반이다.”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유학 중이던 1999년 벨기에의 거장 지휘자 필립 헤레베헤에게 발탁돼 고음악계 발을 들여놓은 임선혜는 풍부한 감성과 투명한 음색, 당찬 연기력으로 지난 15년간 세계무대를 누볐다. 유럽의 자존심으로 통하는 바로크 음악계의 정상에 선 거의 유일한 동양인이기도 하다.

아르모니아 문디가 “동양으로부터 온 신선한 충격인 임선혜를 내세워 동양에 우리 음악을 전하는 계기로 삼자”는 구상을 시작한 건 지난 2002년. 계속 이야기는 오갔으나 바쁜 스케줄 탓에 차일피일 미뤄지다 2008년 다시 논의가 이뤄졌다.

“문디 사장이 아시아인인 내게 아무런 편견 없이 프랑스 바로크를 제안해서 다소 놀랐다. 오르페우스가 너무 하고 싶다고 전했고, 이탈리아와 프랑스 바로크 작곡가 각각 2명의 작품을 제안했다. 원래는 ‘임선혜가 여러 언어의 노래를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독일 작곡가의 작품도 골랐으나 음반이 꽉 차버려 독일음악은 포기했다.”

◆ 남자 역·해설까지 소화한 1인극 음반…비탄의 서정·저음 구현

‘오르페우스’ 음반은 남자인 오르페우스, 사랑의 신 등 여러 역할을 혼자서 노래하고 내레이션까지 소화하며 전체 이야기를 끌고 가는 모노드라마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이를 위해 임선혜는 여러 오르페우스 주제의 곡들 가운데 소프라노가 혼자 할 수 있는 솔로 칸타타를 고르는데 공을 들였다.

▲ 아르모니아 문디를 통해 발매한 임선혜의 첫 독집 '오르페우스'

“사랑에 빠진 남자의 감성을 노래하는 게 제일 궁금했다. 남자들은 이렇게 사랑하겠구나 상상하면서 노래를 해 굉장히 재밌었고 가장 큰 매력이었다. 여자가 할 수 있는 노래의 언어가 어니더라. 하하. 여자는 사랑을 잃었을 때 그렇게 표현하지 않는데 남자는 너무 시적으로 말한다. ‘너 때문에 범죄를 저질렀구나, 니가 다시 돌려놔라’ 같이 통쾌한 면도 있었다.”

특히 그동안 오페라에서 통통 튀고 발랄한 역을 주로 해왔는데 이번 곡들은 사랑을 잃은 남자의 이야기라 비탄에 빠진 깊은 감정으로 노래했다. 음악가로서 표현할 수 있는 서정성을 많이 담았다.

“이제까지 빠른 노래에서 고난도 기교를 과시하며 발랄하면서 관능미 넘치는 노래 많이 불렀다면 신보 수록곡들은 느린 템포에 메조소프라노의 저음을 구사하는 경우가 많다. 저음의 감성을 느낄 수 있고, 라인이 길어서 슬픈 마음이 잘 묻어날 거다. 지휘자 르네 야콥스가 배역을 부탁할 때 ‘가볍고 통통 튀는 소프라노지만 마음 한 구석엔 슬픈 여주인공을 표현할 수 있는 감성이 있다는 걸 안다’는 듯 아주 깊은 슬픔이 담긴 아리아 1~2개를 꼭 주곤 했다. 내가 나이를 먹고 성숙해지면 그런 면이 더 나오겠구나 기대했던 것 같다.”

◆ 자신의 얼굴 보지 않을 정도로 현지 문화 습득에 ‘올인’

임선혜는 언어와 외모, 문화적 배경이 다른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장벽 높은 유럽 오페라 무대에서 캐릭터와 하나가 되는 연기력으로 각광받는다. 연습과 노력의 결과물일 것으로 예상되지만 다른 특별한 비결이 있을까.

 

“평소 내 얼굴을 보지 않는다. 늘 외국인들만 보이므로 나조차도 외국인인 줄 알고 생활하게 된다. 무대에서 노래하는 건 4~5시간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거기서 살아야하는 게 현실이다. 언어 공부는 기본이고 문화, 사람들의 행동 등을 굉장히 많이 관찰해야 한다. 그 문화에 적응하지 않으면 색깔을 낼 수가 없으니까. 굉장히 많은 시간을 들여 습득했고 자연스럽게 만들어갔다. 한국어를 잊어버릴 정도로. 그러다보니 이 사람들이 재밌을 때나 슬플 때 이런 표정을 짓는구나, 알게 되더라. 동양인이라 계약이 파기된 적도 있었지만 동양인인 내가 그런 페이스를 보여주니까 기대하지 않았던 데서 오는 공감대? 신기해하고, 캐릭터를 하나 주면 더 튀게 되니까 역이용하더라. 그러는데 15년이 걸렸다.”

그에 따르면 현지에서 활동할 때 그 나라의 문화에 적응하는 건 기본적인 예의다. 르네 야콥스는 임선혜가 그들의 문화에 동양적 스피릿(정신)을 넣어줬기 때문에 특별하다고 말한 바 있다.

◆ 고음악은 ‘건강한 소통의 음악’…매력 전하는데 앞장설 계획

2년 전부터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한다. 스스로를 고음악 가수라고 평가하진 않는다. 우연한 기회에 입문하게 됐고, 틀에 갇히지 않은 채 클래식 오페라, 예술가곡 등 다양한 노래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오케스트라의 규모와 사운드가 점점 커져 왔다. 그런데 원래로 돌아가 옛날 악기로 작은 규모, 작은 사운드로 연주를 하니 가사가 들리고 연주자끼리 소통하는 음악이 가능해졌다. ‘고음악 운동’은 큰 사운드와 웅장함을 기대하기보다 좋은 음식을 조금씩 맛본다는 생각으로 접하는 거다. 많이 맛보면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지지 않을까 싶다."

고음악(원전음악)은 혼자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음악이 아니다. 옆에 자리한 음악가들과의 교류가 보이며 소통하면서 순간순간 음악의 색깔을 바꿔나가는 음악이다. 보다 내밀하고 퍼스널한 음악이다. “우리 사회에도 건강한 음악”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고음악에 사명감 같은 것이 생겼다. 사람들이 많이 아는 노래는 나보다 잘하는 분들, 하실 분들이 많지만 고음악의 독특한 매력을 전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인 것 같다. ‘낯선 노래지만 임선혜가 부르면 공감된다’란 소리를 듣고 싶다.”

임선혜는 올해 '오르페우스' 음반 외에 피츠버그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말러교향곡 2번 등 3장의 협연 음반을 발매한다. 내년 10월에는 LG아트센터에서 베를린 고음악 아카데미와 함께 국내 관객들에게 이번 음반에 담긴 곡을 직접 들려줄 예정이다.

 

[취재후기] 문을 꽁꽁 걸어 잠근 채 예술의 성채에서 지내는 사람이 아니다. 스스로 사회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조곤조곤 쉴 새 없이 말을 이어가는 임선혜로부터 원전을 연구하고, 검증해나가는 학자의 분위기마저 감지됐다. 음악의 의미, 사회적 영향력에 대한 고민에 빠져있던 2009년부터 ‘임선혜의 희망 콘서트’를 매년 진행해오고 있다. 지난해부터 장애인 복지관에서 연주회를 하는데 올해는 지난 9월 안산에서 소외된 이웃과 함께했다. 음악을 통해 위로와 기쁨을 새삼 깨닫는다는 그로부터 반짝반짝 빛나는 소명의식이 느껴졌다.

goolis@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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