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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원기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꿈은 가난하지 않았다던 아름다운 올림픽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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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원기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꿈은 가난하지 않았다던 아름다운 올림픽 정신
  • 안호근 기자
  • 승인 2017.07.28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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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큐) 안호근 기자] 한국 레슬링의 한 획을 그었던 LA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김원기 씨가 향년 55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그는 떠났지만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다운 아름다운 도전 정신은 깊이 새겨볼만 한 하다.

27일 낮 강원도 원주 치악산에서 아내와 함께 산행을 하던 중 갑작스럽게 심장마비 증세를 보이며 쓰러졌다. 119 산악 구조대가 헬기를 이용해 그를 병원으로 옮겼지만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1984년 로스엔젤레스 올림픽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62kg급에 출전한 김 씨는 한쪽 눈이 퉁퉁 부은 상황에서도 불굴의 의지로 금메달을 수확했다. 이 장면은 온 국민에게 감동을 안기기에 충분했다.

일제 치하 속에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생이 금메달을 딴 것을 제외하면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에서 양정모(64)가 첫 금빛 소식을 전한데 이어 2번째 한국의 금메달이었다. 한국 레슬링은 LA 대회에서만 금메달 2개, 은메달 하나, 동메달 4개를 수확했다.

이후 거의 모든 올림픽 때마다 금빛 쾌거를 이루는 레슬링 강국으로 거듭났다. 김원기 씨가 한국 레슬링 부흥에 마중물 역할을 한 것이다.

선수 생활을 마친 뒤 보인 그의 행적 또한 주목할 만 했다. 그는 돌연 보험회사 영업사원으로 변신해 제2의 삶을 살았다. 빚 보증을 잘 못 서는 바람에 전재산을 탕진하기도 했지만 이후 엔에스하이텍의 대표이사로 자리 잡았고 2009년 뒤늦게 학구열을 불태우며 경희대에서 체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도 했다.

올림픽 정신으로 드라마 같이 재기에 성공한 김원기 씨는 이후 대학과 운동 선수들을 상대로 강단에도 종종 서 파란만장한 인생을 통해 얻은 노하우를 전수하기도 했다.

한 특강에서 김 씨는 “집은 가난했지만 꿈은 가난하지 않았다”며 “진심의 나의 무기”라고 말했다. 보잘 것 없는 한 농촌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꿈을 잃지 않고 결국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고 느즈막히 대기업에 취업해 사회생활을 배우며 어려움을 겪은 이야기, 마침내 창업을 통해 성공한 CEO의 길을 걷게 된 스토리가 주된 내용이었다.

김 씨가 보험 영업을 하게 된 계기는 실업팀에 입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가대표 14명 중 실업팀 입단을 못했던 건 김 씨가 유일했다. 그러나 김 씨는 이를 전화위복 삼았다. 그는 “큰 시련이 있었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한 도전 정신이 저를 여기까지 오게 했다”며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 다가서면 성공의 길은 보인다”고 강조했다.

김 씨는 전남 함평군 레슬링협회 회장을 맡으며 후배 양성에 힘을 썼다. 어려운 상황을 딛고 일어선 시절을 생각하며 후배들을 도왔다. 이에 그치지 않고 법무부 교화위원으로 활동을 하며 재소자들을 만나 꿈과 용기를 잃지 말 것을 강조했다.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게 포기가 아닌 도전 정신을 외쳤던 김 씨의 숭고한 도전 정신은 현대인들이 다시 한 번 가슴 속에 새겨야 할 가치 있는 자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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