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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강박과 집착의 굴레를 벗고, '명량' 최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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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강박과 집착의 굴레를 벗고, '명량' 최민식
  • 용원중 기자
  • 승인 2014.07.28 11: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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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 글 용원중기자·사진 최대성기자] 30여 년 연기 인생에서 가장 미치고 팔짝 뛰게 만든 캐릭터이자 작품이었다. 성웅 이순신 그리고 인간 이순신. 평범한 한 인간으로서도, 난세에 구국의 영웅으로써도 불가해했다. 12척의 배로 울돌목에서 왜선 133척을 격파한 명량대첩을 다룬 ‘명량’(30일 개봉)의 주역 최민식(52)의 이마엔 여전히 깊은 주름이 패어 있었다.

왜군의 침략 이후 오랜 전쟁으로 혼란이 극에 달한 조선, 누명을 뒤집어 쓴 채 파면당해 한양으로 압송, 온갖 고문을 당한 뒤 삼도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이순신에겐 12척의 배 그리고 전의를 상실한 병사와 두려움으로 가득 찬 백성만 남아 있었다.

 

촬영 전 최민식은 제작진에 진도 씻김굿을 제안했다. 굿판에서 그는 눈물을 펑펑 흘렸다. “험한 촬영이 예상되고, 안전사고 역시 중요한 문제였다. 많은 분들이 희생된 역사를 영화화할 때는 예를 갖추는게 좋지 않겠나, 생각했다. 김한민 감독과 상의 끝에 전통 진도 씻김굿이 옳은 방법이라 결정했다. 그래서인지 무탈하게 촬영이 끝났다.”

영화는 명량대첩 전후를 둘러싼 짧은 시기에 대한 기록이다. 장군의 내면에는 희망과 절망, 용기와 두려움, 고독, 책임감 등 폭넓은 진폭의 감정이 들끓었다. “슈퍼히어로가 아니다. 우리와 똑같이 분노하고, 좌절하는 빈틈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토록 어마어마한 실천은, 업적은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수양의 결과다. 자신의 의지를 냉정하게 몰아넣고 지켜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지, 아직도 이해되지 않아 물어보고 싶다.”

 

촬영 전 ‘난중일기’와 위인전을 독파하는 등 인물에 대한 연구와 치열한 고민을 거듭했다.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존경하는 인물이기에 이전과 다른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졌다. “강박에서 헤어날 수 없었던 게 허구가 아니지 않나. 그분을 연기하면서 복잡한 상황과 심리 갈등을 나 나름대로 상상할 뿐인데 진짜 어땠을까, 끝없이 궁금했다. 내 연기가 흉내만 내는 거짓말 같았다. 처음이었다. 그 절대적 존재감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졌다. 책 몇권 읽었다고 해서 그분을 얼마나 이해했겠나.”

처음엔 최민식 역시 ‘저런 사람이 어떻게 있겠어’란 경외와 의문으로 접근했다. “초등학교 시절 조회시간에 ‘애국가’에 이어 고 이은상 작사 작곡의 ‘충무공의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난다. 민족의 구심점으로 충성심을 배우자는 의도였을 거다. 이 영화는 그런 게 아니다. ‘난중일기’를 독파하며 접한 그는 무심하리만치 자신의 할 말만 뚝뚝하고 감정을 내색하지 않는다. 결코 자신을 미화하지 않는다. 솔직담백하다. 신상필벌이 정확하다. 순수한 감성이 있는 분이다. ‘비’ ‘비’와 같이 반복하는 단어를 읽으며 내리는 비를 깊게 바라보셨구나, 천갈래 만갈래 생각하셨구나, 싶었다.”

 

충무공 연기는 그에게 독이자 약이었다. “내가 더욱 초라해졌다. 이런 속물이 없다. 당시 내가 군졸이었다면 장군이 ‘같이 죽자’고 할 때 도망쳤을 거다. 딸린 식구 등을 변명하며. 군인이기 이전에 사람 아닌가. 장군의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기 위해선, 죽어야겠지“란 말처럼 실천은 위대하다. 그를 통해 나를 되돌아보고 용기를 얻게 됐다. 어느 순간 잃어 버렸던, 잊고 살았던 가치를 생각해냈다. 그야말로 힐링이 됐다.”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충무공 이순신을 다뤘다. 젊은 연기파 김명민의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은 아직껏 대중의 뇌리에 깊이 각인돼 있다. 그런 인물을 연기하는데 부담은 없었을까. “큰 스트레스로 작용하진 않았다. 우리는 비교당하는 직업이다. 김명민의 이순신을 의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거다. 비교 평가는 관객의 특권이다. ‘내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순간, 인생은 꼬이게 된다. 김명민의 연기로 인해 이 작품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면 좋은 거다. 나이, 목소리, 외모, 표현이 다르기에 다른 이순신이 나오지 않나. 그 전의 연기들을 받아들이며 다른 이순신을 만드는 재미를 느꼈다.”

‘명량’은 요즘 영화 트렌드인 멀티 캐스팅이다. 항간에는 왜군 장수 역 류승룡, 조진웅과 같이 쟁쟁한 배우들을 적절히 활용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고개를 내민다. “‘명량’은 대립구도의 무협영화가 아니다. 다들 시나리오를 보고 결정했다. 이순신의 신념을 다룬 영화임을 알고, 출연 비중을 감수하고 출연했다. 만약 안배 차원에서 영화적 장치를 했다면 본질에서 벗어났을 거다. 이는 배우들에게도 좋지 않다. ‘이번엔 너가 대장해라, 내가 부관할게’ 식으로 만들어가는 재미가 있다. 매번 주연 혹은 조연하는 거 재미 없다. 같이 작품 만들어나가고 퀄러티를 높여가는 게 중요하지 이 좁은 바닥에서...그런 시선은 유치하다.”

 

영화에는 최민식 외에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배우들의 연기향연을 감상하는 재미가 크다. “왜군 수장으로 나오는 김명곤 선배의 일본어 대사는 현지인이 깜짝 놀랄 만큼 완벽했다. 엄청난 파워로 조선 수군의 대척점에 서 있었기에 밸런스 유지가 가능했다. 역량 있는 배우들이 머리를 박박 밀고 참여해 준 걸 보면서 프로페셔널한, 의식 있는 배우들이라고 생각했다. 캐릭터와 작품에서 자연스럽게 서로 교류하면서 작업해 나간다면 전반적인 한국영화의 퀄러티가 높아질 거라 확신한다.”

2001년작 ‘파이란’의 할리우드 리메이크 작업이 7년 만에 재가동됐다. 2007년 바딤 페렐만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직후 내한, 최민식을 만나 “당신의 배역에 누구를 캐스팅해야 할지 모르겠다. 로버트 드 니로도 소화하지 못할 만큼 압도적인 연기를 해서다”라고 극찬한 바 있다. “당시 페렐만 감독이 내게 특별출연을 부탁했다. 러시아계 깡패인 까레이스키 역이었다. 좋다고 했다. 드디어 다시 만들어지나 보다. 이번에 리메이크한다면 내가 연기했던 3류 양아치 강재 역에 베니치오 델 토로가 어울릴 것 같다. 건달 분위기가 나면서 따뜻한 느낌도 있고.(웃음)”

 

뤽 베송 감독의 할리우드 액션영화 ‘루시’에서 지하세계의 악명 높은 미스터 장 역할을 맡아 미녀배우 스칼렛 요한슨과 촬영을 마쳤다. 영화는 지난주 북미 개봉돼 박스오피스 정상을 차지했다. “한국어로 대사할 수 있어서 출연한 거다. 영어 연기는 어색하다. 연출과 달리 대사를 통해 캐릭터와 정서를 표현해야 하는데 인종, 국가, 문화가 다른데 맛깔스럽게 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 이번에 작업하면서 보니 해외 영화인들이 한국영화를 무척 궁금해 하고, 한국에 와서 영화작업을 하고 싶어한다. 그들에게 ‘우린 밤새 일하고, 오버차지도 없어. 야전 스타일이야’라고 했는데도 그런다. 그들과 다른 스타일, 주제의식, 표현방식이 매력적인가 보더라. 똑같은 액션과 러브라인을 그려도 달라서 호기심을 많이 갖더라. 우리가 더 이상 변방이 아니구나, 한국 영화시장 위상이 중요하게 부상했다는 점에서 뿌듯했다. 굳이 외국에 보여주려고 할게 아니라 안에서 우리 것을 잘하면 관심을 가져줄 거다.”

‘파이란’ ‘올드보이’ ‘취화선’ 이후 오랜만에 최민식이란 배우 혼자서 2시간 넘게 영화를 지배하는 경험을 목도하게 됐다. 반갑고 소중하다. 다음 영화에서 우리는 최민식의 어떤 얼굴을 기대할 수 있을까. “중년 남자의 사랑을 그린 멜로영화에 출연하고 싶다. 자신의 처지 탓에 용기를 낼 수 없고, 절제할 수밖에 없는 남자 캐릭터. 그러면서 유머러스하고 웃기는 인물을 그려보고프다. 최민식판 ‘밀회’? 징그럽다. 그러면 ‘물회’가 되는 거지. 하하.”

 

[취재후기] 인터뷰 내내 고뇌 어린 표정을 이어갔다. 아직도 성웅의 자기장에서 벗어나지 못한 느낌이었다. 최민식은 얼굴 자체에 스펙터클을 지닌 흔치 않은 배우다. 성웅의 갑옷을 두르고 스크린에 등장하는 순간, 존재만으로 관객을 울컥하게 하는 힘이 있다.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 등에 앞장 서며 힘든 시절을 보냈던 그의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누구보다 꼿꼿하게, 목소리를 높이며 '행동하는 영화인'으로 살아왔던 그에게 '이순신'으로 지냈던 한철은 그야말로 지독했을 듯싶다.

goolis@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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