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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인수대비의 며느리 폐비 윤씨(연산군 모친) 사사사건, '연려실기술'의 기록은 사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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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인수대비의 며느리 폐비 윤씨(연산군 모친) 사사사건, '연려실기술'의 기록은 사실일까?
  • 류수근 기자
  • 승인 2018.03.18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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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큐) 류수근 기자] 517년을 이어진 조선왕조는 모두 27대에 걸쳐 왕의 계보를 이뤘다. 이중 연산군과 광해군, 두 분의 임금이 반정에 의해 왕좌에서 쫓겨났다. 그 중에서도 연산군은 조선왕조를 통틀어 최악의 폭군으로 기록되고 있다. 1494년부터 1506년까지 12년간의 통치기간 중 이렇다할 업적없이 피비린내 나는 학정을 펼쳤다.

연산군이 이처럼 폭군이 된 배경에는 어머니였던 폐비 윤씨의 비극적인 죽음을 알게 된 것이주된 배경이라고 잘 알려져 있다. 

 

 

"고얀 것, 당장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려라!”

드라마 속에서는 인수대비가 며느리였던 폐비 윤씨를 내쫓고 사약까지 내려 사사한 ‘악녀’처럼 그려진다. 과연 그 이야기는 사실일까?

18일 오후 방송되는 KBS 1TV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인수대비는 과연 며느리를 죽였나‘라는 화두로 조선시대의 비극적인 역사적 사건을 되돌아 본다.

조선 9대왕 성종의 아내였던 폐비 윤씨, 그녀는 후손이 귀했던 조선 왕실에서 연산군까지 출산했지만 성종의 후궁들에게 투기했다는 이유로 폐비된다. 그 후 사가로 쫓겨난 폐비 윤씨는 결국 사약을 받고 쓸쓸하게 비운의 생을 마감한다. 조선 역사상 왕비가 사사된 최초의 사건으로 기록돼 있다.

드라마 속에서는 시어머니인 인수대비가 폐비 윤씨의 죽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묘사됐다. 이같은 내용은 조선 후기 학자 이긍익이 쓴 조선시대 야사집인 '연려실기술'의 '기묘록'에 수록된 내용에서 기인한다. 

과연 인수대비는 누구였고, 이같은 드라마 내용은 얼마나 역사적 진실에 부합할까? 정사에도 인수대비는 못된 시어머니로 기록돼 있을까? 

인수대비의 삶의 역정을 잠시 살펴보자. 명문가 청주 한씨 집안의 딸이었던 인수대비는 수양대군의 며느리가 된다. 그 후 계유정난을 통해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하며 세자가 된 남편을 따라 세자빈으로 책봉된다. 하지만 3년도 지나지 않아 남편 의경세자가 죽고 그녀는 하루아침에 청상과부 신세가 되어 궁을 떠난다. 

하지만 그녀의 인생은 몇 년 후 또 한 번 요동치며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조선 8대왕 예종이 즉위 2년도 되지 않아 죽고 만 것. 제9대 왕은 예종의 아들이 아닌 조카 자산군(성종)이었다. 바로 인수대비의 아들이었다.

 

 

 

13살의 성종을 대신해 할머니 정희왕후가 조선 왕조 최초로 수렴청정을 했다. 수렴청정 기간 동안 인수대비는 정희왕후에게 도움을 주고받으며 큰 힘이 되고, 명과의 외교 문제에서 고모인 공신부인과 안팎으로 정치적 영향력도 발휘한다.

성종은 성리학 이념으로 국가를 통치하려 한 임금이었다. ‘품위 있는’ 인수대비는 어머니로서 아들을 도와주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그녀의 정치적 활동에 신하들의 불만은 늘어 갔고 급기야 조선에 괴이한 동물이 등장하고 신하들의 거센 반발이 이어진다. 성종실록 291권에는 “중부 견평방의 민가에서 세 발 달린 닭을 낳았다”고 적고 있다.

성리학을 지지했던 인수대비가 이토록 신하들의 맹렬한 비판을 받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성품에 논란이 있었던 폐비 윤씨는 궁궐에서 쫓겨나다 못해 사약을 받았다. 조선왕조 가장 피비린내 나는 비극의 서막을 연 폐비 윤씨의 죽음. 과연 그 책임을 인수대비에게 물을 수 있을까?

성종실록 144권에는 “이에 곧 좌승지 이세좌에게 명하여 윤씨를 그 집에서 사사하게 하고, 우승지 성준에게 명하여 이 뜻을 삼대비전에 아뢰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독한 시어머니의 이미지에 갇혀 있는 인수대비의 참 모습을 이날 ‘역사저널 그날’에서 시간여행을 통해 추적해본다.

[사진= KBS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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