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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Q스페셜] '감동 14'(중) 역경 이겨낸 '인간승리' 그들은 영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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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Q스페셜] '감동 14'(중) 역경 이겨낸 '인간승리' 그들은 영웅이었다
  • 박상현 기자
  • 승인 2014.12.30 10: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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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2014, 팬들이 감사해야할 감동 스토리 14선] 위기의 순간에서도 잃지 않음 희망, 결국엔 값진 열매로

[편집자주] 어느덧 2014년도 저물어간다. '다사다난했던 1년'이란 말이 진부한 표현이 됐을 정도로 한해가 바쁘게 흘러갔다.

스포츠 현장도 마찬가지다. 올해 초부터 소치 동계올림픽이 열렸고 여름에는 브라질에서 국제축구연맹(FIFA) 브라질 월드컵이 벌어졌다. 가을에는 인천에서 아시안게임과 장애인 아시안게임이 펼쳐졌다. 2014년은 FIFA 월드컵과 동계올림픽, 아시안게임이 동시에 열리는 4년 주기의 해여서 대형 스포츠 행사가 많았고 그만큼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스포츠 현장은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휴먼 스토리'의 연속이다. 그런만큼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감동이 존재한다. 올 한해 스포츠 현장 사람들이 만들어낸 감동은 너무나 손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스포츠Q 박상현 기자]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굴곡이 있기 마련이다. 어느 길이든 평탄한 길은 없다. 지금은 평탄한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이미 그 이전에 굴곡을 겪었기에 오늘날의 평탄함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 굴곡을 어떻게 이겨내고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느냐다. 수많은 시련과 고난에 자의 또는 타의로 자신의 길에서 벗어나게 된다. 타의로 벗어나게 된다면 불가항력일 수 있겠지만 자의로 포기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수많은 굴곡과 역경에서도 이들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주위에서는 그만 포기하라고 하고 이만하면 충분히 노력했다며 어깨를 두드렸다.

하지만 이들은 결코 만족하지 않았고 결국 역경을 이겨냈다. 앞으로 또 어떤 일이 펼쳐질지는 알 수 없다.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보다 더 순탄할 수도 있고 또 다른 역경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들은 어떤 역경이 닥쳐와도 이겨낼 수 있는 '멘탈갑'으로 무장했다.

▲ 올시즌 MVP에 오른 서건창은 불과 6년 전만 하더라도 신고선수였다. 2008년 LG 신고선수로 입단했지만 불과 한 시즌만에 방출됐던 그는 2011년 가을 넥센의 신고선수로 입단했다. 그는 두번째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넥센 입단 세 시즌만에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선수가 됐다. [사진=스포츠Q DB]

6. 서건창 신고선수에서 MVP까지

서건창(25·넥센)은 불과 6년 전만 하더라도 그 누구로부터도 주목을 받지 못했다. 광주일고 시절 화순고 출신의 김선빈(KIA), 동성고 출신 노진혁(NC)과 함께 '호남 3대 유격수'로 꼽힐 정도로 유망주였지만 왜소한 체격 조건에 발목이 잡혔다.

그는 신인 드래프트에서 외면당했다. 이후 고려대 입학 제의가 있었지만 이를 뿌리치고 2008년 LG 신고 선수로 입단했다. 2014년말 드라마계를 강타했던 '미생'의 장그래나 다름없었다.

그의 1군 무대 성적은 보잘 것 없었다. 2008년 LG에서 한 타석에 들어서 삼진만 한차례 당했을 뿐이었다. 1년만에 방출됐다.

입대를 결심하고 경찰청에 지원했지만 이마저도 떨어져 현역으로 군 복무를 마쳤다. 이쯤 되면 보통 선수들은 야구계를 떠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는 제대후에도 야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입단 테스트를 받으러 다녔고 결국 2011년 가을 넥센의 입단 테스트에 합격했다. 그가 처음 받았던 등번호는 111번이었다.

이때부터 서건창의 야구 인생에 비로소 빛이 들기 시작했다. 겨울과 스프링캠프 동안 구슬땀을 흘린 그는 2012년 개막엔트리에 들어 127경기에 나섰다. 그의 성적은 433타수 115안타. 4년 전 1군 무대에서 1타수 무안타에 그쳤던 것과 하늘과 땅 차이였다.

2012년과 지난해 0.266의 타율을 기록한 그는 올 시즌 '안타 제조기'로 거듭났다. 타석에 들어서면 안타고 출루였다. 그 누구도 넘어서지 못했던 시즌 200안타 기록을 돌파하며 201개의 안타를 때려냈다. 직전 세 시즌에서 때렸던 안타 합계보다 2개가 더 많았다. 타율은 0.370까지 치솟았고 장타율(0.547)과 출루율(0.438)에서도 넥센의 1번 타자로 손색이 없었다.

그는 결국 최우수선수(MVP)가 됐다. 50홈런을 넘어선 팀 동료 박병호(28)를 앞질렀다. 외면과 무관심, 방출 속에서도 그는 희망을 잃지 않았고 결국 '신고선수 신화'를 썼다.

7. 넘어지고 '나쁜 손' 뿌리치면서도 올림픽서 금2·동1, 스피드스케이팅 전향 박승희

박승희(22·화성시청)의 소치 동계올림픽은 특별했다. 그 시작은 여자 500m였다.

여자 500m 결승까지 진출한 박승희는 리지안루(중국), 아리아나 폰타나(이탈리아), 엘리스 크리스티(영국)과 함께 레이스를 펼쳤다. 준결승에서 가장 좋은 기록을 거둬 가장 안쪽에서 출발할 수 있는 유리함까지 얻었다.

하지만 무리하게 끼어들던 크리스티가 폰타나와 부딪히면서 넘어졌고 이 과정에서 크리스티에 부딪힌 박승희까지 중심을 잃고 나뒹굴었다. 바로 일어나 레이스를 재개하려던 박승희는 한번 더 앞으로 넘어지는 바람에 4위로 처졌지만 크리스티가 실격 처리되면서 동메달을 따냈다.

여자 3000m 릴레이에서 금메달을 따내며 여자 500m의 아쉬움을 뒤로 한 박승희는 여자 1000m에 출전, 당당하게 금메달을 따냈다. 박승희는 판커신(중국)의 '나쁜 손'도 이겨내고 당당하게 2관왕의 영예를 안았다.

유일하게 여자 쇼트트랙 2관왕에 오른 박승희는 스피드스케이팅 전향에 도전했다. 올림픽 쇼트트랙 챔피언이라는 영예에 만족하지 않고 스피드스케이팅이란 새로운 영역에 도전한 박승희는 전향 3개월만에 500m 기록을 41초00에서 38초75까지 단축시키며 스프린터로 변신하고 있다.

8. 안현수에서 빅토르 안으로

안현수, 아니 빅토르 안(29·러시아)만큼 올해 세계 스포츠계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쓴 선수도 없다.

안현수가 러시아로 귀화한 것을 두고 파벌 문제 등의 논란이 일었다. 안현수는 뒤늦게 "파벌은 있었지만 그것이 귀화의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다"면서 "정말 좋아하는 운동을 계속 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전무후무한 세계선수권 5연패와 2006년 토리노 올림픽 3관왕 등 화려한 전성기를 보낸 안현수에 대한 국내의 대우는 적절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안현수는 파벌 논란과 함께 소속팀 해체로 선수 생명까지 위협받으면서 좋아하는 쇼트트랙을 계속하겠다는 일념으로 러시아행을 선택했다. 러시아빙상연맹의 초청을 받아 러시아로 건너간 안현수는 귀화를 받아들이며 '빅토르 안'이라는 이름까지 받아들였다.

소치 올림픽에서 선 빅토르 안은 1000m 금메달을 따내면서 엎드려 울었다. 빅토르 안은 500m 뿐 아니라 5000m 릴레이까지 석권하면서 3관왕에 올랐다. 빅토르 안은 1500m 동메달로 자신이 출전한 모든 종목에서 메달을 획득했다.

빅토르 안의 성공적인 복귀는 개인적으로는 인간 승리의 표본이 됐지만 반대로 한국 쇼트트랙은 자성의 계기가 됐다. 금메달은 커녕 단 1개의 메달도 획득하지 못한 남자 쇼트트랙은 이후 개혁을 거쳐 2014~2015 시즌 ISU 월드컵 시리즈에서 부활했다.

9. 노장 이규혁의 마지막 질주, 노메달의 영웅

한국 빙상 역사에서 이규혁(36)은 전설로 남았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빙상신동 소리를 들었던 그는 중학교 재학 중이던 1992년 국가대표로 뽑혀 세계 주니어 선수권에 참가했다. 이어 만 15세인 1993년에 국가대표로 선발돼 1994년 릴리함메르 동계올림픽에 참가했다.

이규혁은 이때부터 역사를 써갔다. 릴리함메르 동계올림픽을 시작으로 1998년 나가노 대회,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대회, 2006년 토리노 대회, 2010년 밴쿠버 대회, 2014년 소치 대회까지 무려 6차례 올림픽에 출전했다. 그가 처음으로 동계올림픽에 출전했을 때 이상화(25)는 겨우 다섯살 꼬마였다.

그는 세계스프린트선수권에서 2007년과 2008년, 2010년, 2011년에 금메달을 따내고 2011년 세계종목별선수권 남자 500m에서 정상에 오르는 등 세계 정상권 선수로 자리했지만 정작 올림픽과는 인연이 없었다. 1994년부터 꾸준히 도전했지만 끝내 올림픽 메달을 따내지 못했다.

올림픽 메달은 단 하나도 따내지 못했지만 그는 메달 없이도 선수가 얼마나 위대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지난 4월 7일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식 은퇴식을 가지면서도 그는 환하게 웃었다.

이규혁은 "예전에는 올림픽 메달을 따지 못해 슬펐고 좌절감도 컸지만 지금 생각하니 슬픈 것도 아쉬운 것도 아닌 하나의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며 "올림픽 6회 출전이 메달보다 더 값지다"는 소감을 밝혔다.

10. 비주류 임창우와 이광종 감독, 아시안게임을 휩쓸다

한국 축구에는 오랜 숙원이 있다.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과 아시안게임 우승이다. AFC 아시안컵은 1960년 이후 54년째 정상에 서지 못했고 아시안게임의 경우 1986년 서울 대회 이후 2010년 광저우 대회까지 금메달 사냥에 실패했다.

이 가운데 한국 축구는 올해 숙원 하나를 풀었다. 28년 만에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냈다. 그것도 무실점 우승이었다.

박종환(1990년 베이징), 아나톨리 비쇼베츠(1994년 히로시마), 허정무(1998년 방콕), 박항서(2002년 부산), 핌 베어벡(2006년 도하), 홍명보(2010년 광저우) 감독도 이뤄내지 못한 금메달을 이끈 지도자는 '비주류'로 통한 이광종(50) 감독이었다.

이광종 감독은 현역 시절 스타플레이어는 아니었다. 유공(현재 제주)과 수원 삼성에서 10년 동안 뛰며 266경기에서 36골을 넣은 기록이 있지만 스타급은 아니었다. 대표팀 경력도 1988년 서울 올림픽 상비군이 전부다. 월드컵도 출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광종 감독은 2007년부터 2009년까지 17세 이하(U-17) 대표팀, 2010년부터 2013년까지 20세 이하(U-20) 대표팀을 이끌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특히 2011년과 2013년 국제축구연맹(FIFA) U-20 월드컵에서는 각각 16강과 8강까지 진출시키며 지도력이 있는 감독으로 떠올랐다.

아시안게임 대표팀에는 이광종 감독만 비주류가 아니었다. 또 한 명의 비주류가 있었다. 바로 오른쪽 풀백 임창우(22)였다.

대전의 임대 선수로 유일하게 K리그 챌린지 선수였던 임창우는 말레이시아와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선제 결승골을 넣은 뒤 북한과 결승전 연장전 추가시간에 극적인 결승골로 한국 축구의 처음과 끝을 장식했다.

[SQ스페셜] '감동 14'(하) 하나로 뭉치니 강해졌다, '함께'의 힘은 위대했다 로 이어집니다 ^^

[SQ스페셜] '감동 14'(상) 2014년 흘린 눈물, 2015년에는 희망 씨앗으로 도 다시 보세요^^

tankpark@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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