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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리뷰] 아버지 열풍 시대 연 '경숙이, 경숙이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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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리뷰] 아버지 열풍 시대 연 '경숙이, 경숙이 아버지'
  • 용원중 기자
  • 승인 2015.03.20 07: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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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 용원중기자] 연극 ‘경숙이, 경숙이 아버지’가 5년 만에 무대로 돌아왔다. 2명의 아버지를 둔 경숙의 이야기이자, 경숙의 친부 이야기다.

극단 ‘골목길’ 대표 박근형 극작·연출의 이 작품은 2006년 초연돼 올해의 예술상, 동아연극상 작품상·희곡상·연기상(고수희) 신인연기상(주인영),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선정 올해의 연극 베스트3, 히서연극상 기대되는 연극인상(주인영)을 휩쓸었다. 2007년, 2009년, 2010년, 2011년 재연 이후 올해 수현재컴피니&씨어터 개관 1주년 기념작으로 관객 앞으로 다시 오게 됐다.

지난해 이후 대중문화계에 아버지 열풍이 이는 가운데 10년 전 기존의 통념을 깨는 아버지상을 내세웠던 작품이 현 시점에 복귀하는 것 자체가 의미 있게 다가온다.

▲ 아버지(김영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경숙(주인영)

한국전쟁이 터지고 경숙이 아버지(김영필)는 아내와 어린 딸에게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각자 알아서 살아남자며 홀로 피난을 떠난다. “너는 내를 닮아 운이 있다. 운명을 믿고 집에 있으면 된다”고 울며 매달리는 경숙(주인영)의 고사리 손을 뿌리친다.

3년이 흘러 아버지는 수용소 동지인 꺽꺽이(김상균)란 남자와 함께 돌아온다. 하지만 이내 꿈을 펼치겠다며 떠난다. 꺽꺽이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대신하며 경숙이를 학교에 보내준다. 경숙 엄마(고수희)는 꺽꺽의 아이를 덜컥 가지고, 집에 들른 아버지는 이 사실을 안 뒤 집문서를 든 채 다시 떠난다.

새 집으로 이사한 경숙이네에 아버지는 화류계 여자 자야와 함께 다시 나타난다. 경숙이는 두 아버지, 두 어머니와 함께 기묘한 동거를 시작한다. 엄마는 결국 유산하고, 자야는 청요리집 요리사와 눈이 맞아 살림을 차린다. 아버지는 표표히 떠난다. 성장한 경숙의 대학 졸업식에 아버지는 남몰래 새 구두를 들고 나타나지만 경숙은 매정하게 뿌리친다. 그 후 경숙은 결혼, "아버지"를 절규하며 출산하는데 아이 얼굴이 외할아버지와 판박이라 모두들 자지러진다.

플래시백으로 시작하는 연극은 한국전쟁부터 1970~80년대에 이르기까지 30여 년에 걸친 세월을 훑어내며 격변의 시대보다 더 드라마틱한 한 가족에 시선을 던진다. 이 작품을 빛나게 하는 요인은 스르르 빠져드는 이야기의 힘과 매력적인 캐릭터들이다.

▲ 경숙의 출산 장면에서 놀라는 예수(이호열) 꺽꺽이(김상균) 어머니(고수희) 자야(황영희)

구성진 장구 장단에 맞춰 소리하기를 즐기던 경숙 아버지는 가장의 책임보다 자유롭게 꿈을 좇으며 살아가길 원하는 인물이다. 아내와 자식으로부터 인정받길 원치도 않는다. 아내의 불륜을 확인한 순간에도 머리채를 휘어잡는 대신 한약 한첩을 건넨다. 풍파를 견디며 가족을 위해 묵묵히 희생하는, 권위적이고 엄격한 두 얼굴의 아버지상을 전복하는 캐릭터다.

정착하지 못하는 경숙 아버지의 자유의지는 고통스러운 가족사를 연출한다. 외간 남자의 아이를 가진 아내는 죄책감 속에 사는 비극을 겪고, 딸은 아버지의 부재라는 상흔을 입는다. 하지만 남자로부터 사랑받고 싶었던 아내는 헌신적인 남자를 만나 평생을 함께한다. 울며불며 아버지에게 매달렸던 꼬마 경숙은 아버지를 사랑하면서도 대립하고, 이해하면서도 갈등하며 어른으로 성장한다.

연극은 10년 전에 탄생했음에도 혈연으로 묶인 부모 자식, 부부 관계뿐만 아니라 개인의 정체성을 새로운 시선으로 성찰한다. 그런 점에서 혁신적이다. “나무는 사람처럼 복잡하지도 않다. 지 자라고 싶은 데로 자라도 크면 다 멋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자기 장단이 있는 것이다. 니도 니 인생의 장단을 두들겨라” “내는 내 혼자니까 나 혼자 할 수밖에 없다”와 같이 경숙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가 읊조리는 대사들은 이런 메시지에 묵직한 힘을 실어낸다.

 

작품을 초연부터 책임져온 연출가와 배우들은 잦은 장면 전환, 절절함과 웃음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가운데서도 호흡을 놓치는 법 없이 완성도 높게 끌고 간다. 고작 나무박스 몇 개를 쌓아놓은 세트는 효율적인 재배치만으로 시공간의 변화를 너끈히 표현한다.

똘망똘망한 소녀 그대로를 보여준 주인영, 복잡한 속내의 경숙 어매를 중량감 있게 연기한 고수희는 표정과 눈빛, 손짓마저 자기 것으로 소화해 절로 무대에 몰입하게 한다. 자유로운 영혼을 호방하게 그려낸 아버지 역 김영필, 앙칼진 경상도 사투리로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자야 역 황영희·강말금의 호연 역시 인상적이다. 4월26일까지 대학로 수현재씨어터.

goolis@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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