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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보스톤' 강제규 감독, 3년의 마라톤 [인터뷰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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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보스톤' 강제규 감독, 3년의 마라톤 [인터뷰Q]
  • 나혜인 기자
  • 승인 2023.10.02 1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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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큐) 나혜인 기자] "요즘 영화계 상황들이 썩 좋지 않으니 신경이 많이 쓰이죠."

영화 '1947 보스톤' 개봉을 앞두고 만난 강제규 감독이 꺼낸 첫 마디는 솔직한 걱정이었다. 갖은 어려움을 겪은 작품을 관객에게 선보인다는 기쁨과 안도도 존재했지만, 한국영화에 대한 우려가 먼저였다.

1996년 영화 '은행나무 침대'로 데뷔한 강제규 감독은 한국영화사에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그의 연출작인 '쉬리(1999)'를 두고 "한국영화는 '쉬리' 전후로 나뉜다"는 말이 있을 정도. 1174만명이 넘는 관객을 모은 '태극기 휘날리며(2004)'는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연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많은 영화인들이 그를 보며 꿈을 키웠고, 많은 한국영화들이 그의 영화를 발판 삼아 탄생할 수 있었다.

강제규 감독.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강제규 감독.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그의 곁에 언제나 영광만이 자리한 것은 아니었다. 장동건, 오다기리 죠, 판빙빙 등 한중일 유명 배우가 함께한 초대형 블록버스터 '마이웨이(2011)'는 사회 분위기 등으로 누적 관객 수 214만명에 그친 '아픈 손가락'이었다. 최근 개봉한 '1947 보스톤'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과 함께 주연 배우 배성우가 음주 운전 논란에 흽싸여 불미스러운 기다림의 시간을 가져야 했다.

"'1947 보스톤'의 불미스러운 일은 저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시간이었죠. 5~6개월간 후반 작업도 못했어요. 혼란스럽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해법이 없으니 답답하고 괴로운 거예요."

강제규 감독은 특정 개인의 일로 실존 인물을 축소하는 게 맞는지 수없이 고민했다. 오늘의 논란은 그에게 도리와 역사의 문제이기도 했다. 관객의 불편함을 줄이기 위한 재편집 과정을 가졌음에도 배성우의 분량이 비교적 많아 보이는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

2019년 촬영해 스크린에 걸리기까지 3년을 기다린 작품이다. 개봉을 결정한 뒤에도 우려의 시선이 많았다. 팬데믹 이후 온라인 동영상 스트리밍 플랫폼(OTT)로 직행하는 영화들도 더러 생겼으니 이 방법을 선택해볼 법 했다. 그러나 강제규 감독은 스크린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 모든 어려움은 곧 전화위복 될 것이라 믿고 긴 레이스를 견뎌냈다. ‘1947 보스톤’을 세상에 내놓기까지의 과정은 강제규 감독에게 마라톤 그 자체였다.

영화 '1947 보스톤' 스틸컷.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1947 보스톤' 스틸컷.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 블록버스터 아닌 ‘진짜 역사’

'1947 보스톤'은 1947년 광복 후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고 국제 대회에 출전하기 위한 마라토너 손기정(하정우 분), 남승룡(배성우 분), 서윤복(임시완 분)의 도전과 가슴 벅찬 여정을 그린 이야기다.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금메달을 목에 걸어야 했던 손기정의 수모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만 광복 후 열린 보스톤 마라톤 대회에서 세계인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한 서윤복과 손기정, 서윤복과 함께 역사를 쓴 남승룡의 이야기는 생소한 이들이 많을 것.

강제규 감독은 “보스톤 마라톤 대회에 세 사람의 이야기가 모두 연결돼 있어 좋았다. 손기정 선생님은 너무나 널리 알려진 분이다. 하지만 남승룡 선생님도 당시 동메달을 딴 선수다. 우리가 너무 1등의 역사만 기억하는 게 아닌가. 남승룡 선생님도 들여다 보면 너무나 훌륭한 마라토너”라며 “손기정 선생님뿐만 아니라 숨겨진 체육 자산인 남승룡 선생님, 일반인은 전혀 모르는 천재적인 체육인 서윤복 선생님을 한 영화에 절묘하게 담을 수 있는 게 바로 이 이야기였다. 1석 3조”라고 말했다.

영화 '1947 보스톤' 스틸컷.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1947 보스톤' 스틸컷.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강제규 감독은 흔히 말하는 ‘국뽕 블록버스터’가 아닌 변방의 작은 나라 ‘코리아'를 거대한 미국 땅에 세긴 세 사람의 땀과 열정을 그리고자 했다. 그는 “’1947 보스톤’을 블록버스터 영화라고 생각했다면 만들지 않았을 거다. ‘태극기 휘날리며’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싸워야 했던 젊은이의 이야기를 그리겠다는 마음이었다면 만들지 않았다. 당시에는 그저 한국 전쟁이 가진 본질에 집중하려 했다”며 “’1947 보스톤’에서 제일 매력적이었던 부분은 아무것도 없이 지지리도 가난한 세 사람이 열악한 환경에서 꿈과 희망을 안고 있다는 점이었다. 자신이 유일하게 잘할 수 있는 달리기를 통해 어떻게 꿈을 실현하고 생존해가는가 보여주고 싶었다”고 전했다.

영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실화 고증’이었다. 강제규 감독은 “다큐멘터리가 아니기에 극화되는 부분은 피할 수 없다. 실화 기반과 역사 왜곡은 미세한 차이로 구분되기 때문에 조심스럽고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며 “역사적 사실을 들여다 보는 나의 시선, 해석하는 방식, 잣대와 주관을 가지고 냉정하게 사실을 보여주려고 했다. 역사를 충실하게 표현하되 필요한 부분만 극화 원칙을 가져갔다”고 밝혔다.

강제규 감독.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강제규 감독.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 영화는 살아 숨 쉰다

“영화 후반작업을 하면서 한국영화가 100년 동안 어떤 변화와 성장을 해왔는지 고민해보게 됐어요. 그중 팬데믹 3년은 30년 이상의 변화가 벌어진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짧은 시간 동안 관람 패턴 변화 등의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에 이것을 적극적으로 반영하지 않으면 굉장히 힘든 결과가 올 수 있겠다 싶었죠.”

강제규 감독은 이를 “가슴 아픈 학습”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팬데믹으로 인해 산업 자체가 위축돼 있다 보니 영화인 전체가 생각보다 더 심각한 분위기”라고 설명하며 “저는 1990년대부터 영화를 시작한 사람으로서 한국영화의 명암을 잘 알고 있다. 한국영화는 언제든지 외면당하고 추락할 수 있다. 저희들끼리 잘 헤쳐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현 사태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결국 ‘콘텐츠’가 중요했다. 그는 최근 비슷한 소재, 이야기의 영화들이 줄이어 제작 및 개봉하는 사태에 대해 “영화가 기획되고 만들어져 가는 과정이 어떻게 보면 차단돼 있지 않나 싶다. 이전에는 제작자, 배급사, 창작자들이 서로 교류하며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방지했다”고 이야기했다.

이와 함께 ‘해운대’, ‘국제시장’, ‘영웅’ 등의 윤제균 감독을 언급했다. 윤제균 감독 역시 손기정 선수의 영화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강제규 감독의 시나리오를 듣고 다른 영화를 하기로 했다고. ‘태극기 휘날리며’ 당시에도 ‘실미도(2003)’와 개봉 시기가 겹치는 상황이 벌어져 텐트폴간의 경쟁을 막기 위해 개봉일자를 조정했다.

강제규 감독.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강제규 감독.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그러나 그의 말대로 2023년은 달랐다. 팬데믹 기간동안 개봉하지 못한 영화들이 밀려 있어 ‘개봉 시기 조율’은 옛말이 됐다. 올 여름만 하더라도 텐트폴 영화 ‘밀수’, ‘비공식작전’, ‘더 문’,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동시기 개봉하며 불필요한 경쟁을 펼쳤다. 특히 ‘비공식작전’은 최근 개봉한 ‘교섭’, ‘모가디슈’와 피랍이라는 특수한 사건을 공유했다.

강제규 감독은 “요즘은 서로서로 아성을 지어놓고 있다. 그러다 보니 유사한 기획들이 만들어진다. 영화인 스스로 개선해 나가야 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이어 “영화가 성공하지 못하니까 투자가 안 되고, 투자가 안 되니까 돈이 돌지 않고, 펀드가 해체되고 영화 만들 돈이 없다.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으니 개봉한다는 것 자체고 부담”이라며 “하지만 위기는 극복되려고 있는 거다. 영화인 모두가 각성해서 관객의 입맛에 맞는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삼고초려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고 덧붙였다.

강제규 감독은 한국영화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당장 선택받지 못한 영화가 뒤늦게 빛을 보는 날도 있으리라. 1990년대부터 2023년이 되기까지, 30년이 넘는 시간을 영화 속에 살아온 이의 경험담이었다.

“어떤 영화를 보면 당시에는 정말 재미없게 본 영화인데 우연히 다시 보게 됐을 때 정말 새롭고 재미있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어요. 영화라는 건 이미 고착된 이야기인데, 상황에 따라 다시 태어나기도 하고, 누가 보느냐, 어떤 감정의 상태에서 보느냐, 어떤 연령에서 보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캐릭터를 갖더라고요. 그럴 때마다 영화는 생물이구나. 고착화될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고, 마치 생명체처럼 존재하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변화하구나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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