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Q 글 용원중기자·사진 최대성기자] “예전에도 앙상블을 하면 키가 워낙 커서 저만 보인다고 하시더라고요. 유독 190cm 같아 보이는 187cm거든요. 여러 사람 무리에서 시원시원하게 잘 보이는 장점이 있지만, 제 키에 맞는 상대 배우가 없다고 중요 캐스팅에서 탈락한 적도 몇 차례 있어요. 급좌절한 순간이었죠.”
◆ 미스 언더스탠딩, 앙상블, 배우반장 ‘멀티맨’ 활약
영국 웨스트엔드 히트작인 쇼 뮤지컬 ‘프리실라’ 한국어 초연(9월28일까지 LG아트센터)에서도 드랙퀸(여장남자쇼 주인공) 캐릭터인 미스 언더스탠딩의 분홍색 깃털이 달린 시스루 의상을 큰 키 탓에 입지 못했다. 해외 공연에 서는 미스 언더스탠딩 배우들의 키가 모두 우찬(30·본명 이경욱)보다 작아 공수해온 의상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의상들 역시 늘이고 수선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무한 긍정의 에너지가 넘친다.
“이 작품에서 첫 대사를 치는 인물이에요. 객석의 분위기를 띄우는 바람잡이 역할을 해야 하고요. 해외 연출과 안무가도 ‘당신이 정말 잘 열어줘야 한다’고 주문을 하니 부담이 백배였죠. 혼자서 죽어라 연습하니까 외롭고 그래서 빨리 관객 앞에서 해보고 싶었어요. 다행히 관객들이 많이 웃어주고 호응해주셔서 가슴을 쓸어내렸죠.”
미스 언더스탠딩 외에 앙상블로 합창과 군무를 소화해야 한다. 화려하고 다양한 의상으로 유명한 ‘프리실라’이다보니 극가 착용할 의상은 총 13벌에 이른다. 무대 뒤 분장실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다. 한 장면이 끝나고 들어오는 앙상블마다 헬퍼가 1명씩 붙어 퀵 체인징을 돕는다. 보통 30초가 걸린다. 공포의 하이힐은 그나마 이전에 뮤지컬 ‘동키쇼’ 때 신어봐서 조금 수월한 편이다.
우찬은 베테랑 경력과 적극적인 성격, 달변으로 인해 출연 배우들과 컴퍼니(공연제작사) 사이의 가교 역할인 배우반장까지 맡고 있다. 배우들의 불편 사항이나 이런저런 요구를 취합해 컴퍼니에 전달하고, 배우들에게 파이팅을 불어넣는 임무를 수행한다. ‘금발이 너무해’ ‘젊음의 행진’ 때에 이어 세 번째다.
“원래 남 앞에 나서고, 리더십 발휘하는 걸 즐기거든요. 물론 매사에 솔선수범하죠. 투표에서 대부분 만장일치로 선출됐는데 하다보면 탈모가 올 정도로 스트레스가 심하더라고요. 이번엔 피하고 싶었는데 대학동기 앙상블이 추천하는 바람에 또 하게 됐네요. 하하. 배우들이 너무 잘 따라와 줘 즐기면서 하고 있어요.”
◆ 서울예대 연극과 출신…영화배우, 가수지망생, 개그맨 전전하다 뮤지컬 배우로
뮤지컬 배우의 꿈을 품고 서울예대 연극과에 입학했다. 과외수업으로 연기학원에 다니다 우연히 영화 ‘와일드 카드’(2003년)에서 당구장 똘마니4 역으로 출연하며 연기의 맛을 살짝 봤다. 이후 서울예대 유명 동아리인 ‘개그클럽’ 20기 회장을 역임하면서 동문 선배인 개그맨 표인봉의 눈에 띄어 가수 연습생, MBC 공개 코미디프로 ‘개그야’의 개그맨으로 활동했다. 대학로의 개그쇼에도 출연했으나 너무 고되 6개월 만에 접었다. 그리고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2007년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을 디스코 버전으로 바꾼 뮤지컬 ‘동키쇼’에 섹슈얼한 남자요정인 코코보이즈 중 한 명으로 출연하게 됐어요. 짧은 팬츠 차림에 상반신을 노출한 역할이었죠. 첫 뮤지컬인 셈이죠. 내가 연기를 전공했고, 노래와 춤을 좋아하니 뮤지컬을 계속 해야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됐어요.”
이듬해 ‘그리스’의 앙상블과 스윙(언더스터디·대역)을 거쳐 소니 등 여러 역할을 섭렵했다. ‘그리스’를 끝내자마자 24세에 현역으로 군입대했다. 2010년 9월 제대하자마자 ‘판타스틱스’의 입을 열지 않는 캐릭터인 뮤트로 무대에 복귀했다. 쥬크박스 뮤지컬 ‘젊음의 행진’에선 앙상블, 멀티맨, 심신 역을 두루 소화했다. ‘역대 최고의 심신 역 배우’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심신 특유의 보컬과 권총춤을 잘 살렸다.
◆ 소극장 뮤지컬서 두 차례 주연 그리고 다시 앙상블
이른 나이에 뮤지컬에 입문해 여러 작품의 앙상블을 전전하는 와중에 주인공도 두 차례나 맡았다. ‘꼬리 많은 남자’의 여우에서 인간이 된 차도일과 ‘달을 품은 슈퍼맨’의 지적 장애인 우현. 모두 소극장 뮤지컬이다. 대극장 무대에선 앙상블이지만, 소극장 공연에선 주연까지 꿰차는 기묘한 상황이다.
“앙상블 가운데 노래와 연기 잘하는 친구들도 많아요. 그런데 관객의 귀가 예민해진 상황에서 가창력이 정말 뛰어나지 않는 한 주연을 하다가도 앙상블로 빠지곤 해요. ‘왔다 갔다’ 모드인 거죠. 그래서 많이들 그만 두기도 하고요. 전 별명인 ‘긍정맨’답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버티고 있어요. 가끔 사회인이 된 학교 친구들로부터 ‘네가 부럽다. 적어도 넌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지 않느냐’라고 격려를 들으면 위안이 되고,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확신이 들어요. 부모님의 정신적 지원도 큰 힘이 되고요.”
인기 많은 아이돌 스타가 어느 날 갑자기 뮤지컬 주인공으로 꽂히고, 업계에서 인지도가 있다는 이유로 주인공에 캐스팅되고, 팬들의 박수와 환호는 주인공에게만 쏟아지는 세상. 승자독식의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은 아닐까.
“철없던 시절엔 성공하고 싶단 욕망이 가득했어요. 군 제대 후 현실을 직시하고 나서 차근차근 내공을 쌓아야 훗날 높이 오르더라도 쉽게 내려오지 않겠구나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직업을 죽을 때까지 오래 하고 싶거든요. ‘오래 가는 놈이 강한 놈이다’라는 말처럼. 서른이면 아직 어리잖아요. 언젠가는 활짝 필거라는 낙관과 희망이 있어요.”
[취재후기] ‘프리실라’ 공연에서 그가 등장할 때 객석 반응은 매우 뜨겁다. 조금은 징그러운 분장이지만 천연덕스런 여장연기와 화끈한 19금 멘트에 관객은 떼굴떼굴 구른다. 관객을 가지고 놀 줄 아는 배우다. 하지만 아직, 그의 이름은 앙상블이다. 공연 후 관객이 “인상적이었다”고 메시지를 보내오면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함을 느낀다. 화장을 지우고 난 우찬은 말 많고, 웃음 많은 해맑은 청춘이다. “더 재밌게 맛깔스럽게 해나가고 싶다”는 다짐을 들으며 그의 이름 두 글자가 공연장 입구 ‘오늘의 캐스팅’ 보드에 당당히 오를 날을 낙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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