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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드배구 시대, 키만 크면 배구를 잘 한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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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드배구 시대, 키만 크면 배구를 잘 한다고요?
  • 최문열
  • 승인 2016.03.02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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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큐) 최문열 대표] “선수는 키만 크면 배구를 잘 할 수 있지만 감독은 키가 크다고 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십 수 년 전, 모 배구감독이 한 말입니다.

그는 현역시절 명성을 날렸던 스타 출신 감독과 벤치 대결을 펼치면서 상대 감독에게 뼈 있는 일침을 가했는데 그 말 속에는 선수와 지도자의 자질과 능력은 다르다는 요지를 담고 있습니다.

▲지난달 25일 16연승가도를 달리며 정규리그 우승을 일찌감치 확정지은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의 3중 블로킹 장면. 3인3색의 표정이 실로 다채롭기 짝이 없다. [사진=스포츠Q(큐) DB]

하지만 요즘 세계배구의 흐름을 지켜보노라면 배구선수의 경우 ‘키만 크면 잘 할 수 있다’는 말에 쉽사리 동의할 수 없게 됩니다. 브라질과 폴란드, 이탈리아 등 남미와 유럽 강호들은 예전에 비해 높이와 힘도 업그레이드된 데다 한 박자 더 빠르게 플레이를 펼쳐 그 위력이 무시무시합니다. 국내에선 일명 ‘스피드배구’로 불리는데 그 진화가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스피드배구는 올 시즌 V리그에서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최태웅 감독(40)이 이끄는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가 스피드배구를 과감히 들고 나와 지난달 25일 ‘디펜딩 챔피언’인 OK저축은행과의 일전에서 신나는 16연승과 함께 남은 2경기에 상관없이 일찌감치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짓는 등 맹위를 떨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2000년대 브라질 대표 팀이 첫 선을 보인 뒤 세계 배구의 대세로 자리매김한 스피드배구가 국내 팬들의 구미를 자극하는 이유는 공격력을 외국인 선수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몰빵배구'의 대안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기존 틀을 파괴하는 스피드배구의 신선함도 한 몫 거듭니다. 그것은 포지션 파괴와 역할 파괴 등 몇 가지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서브리시브 또는 리시브가 불안한 상황에서도 한 박자 빠르면서 공격루트를 다변화해 ‘빠른 배구’로 통합니다.

한동안 배구는 약속된 패턴플레이의 대결장이었습니다. 상대 서브를 안정적으로 리시브해 세터 이마 위로 정확히 띄워주면 세터는 현란한 손놀림으로 상대 블로커를 따돌리고 토스해 공격에 성공하는 방식입니다. 서브리시브가 완벽하면 세터는 A퀵, B퀵, 시간차, 이동, 오픈과 백어택 등 상대 블로커의 움직임에 따라 공격 메뉴를 다채롭게 가져갑니다.

한국배구가 국제무대에서 신체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기를 편 것은 김호철 신영철 등 세계적인 세터를 지속적으로 배출한데다 탄탄한 조직력이 힘을 발휘한 까닭입니다.

그러나 변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 닥쳤습니다. 서비스 개념이던 서브가 공격의 출발이 됐습니다. 스파이크서브 등 강한 서브로 상대의 서브리시브를 무력화해 공격을 단순화시키고 블로킹으로 막는 작전이 주를 이뤘습니다. 강한 서브는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조직배구에 일격을 가했습니다. 강하고 까다로운 서브로 세터 이마 위로 연결하는 서브리시브가 애당초 불가능해지면서 상대 블로커를 농락하는 세터의 토스워크도 ‘그림의 떡’이 됐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패턴플레이보다는 그저 강력한 한방을 지닌 좌우 공격수에게 오픈 토스를 띄워주는 것이 전부였고 이에 따라 상대블로커의 벽에 막힐 가능성도 높아지게 됐습니다. 서브리시브 성공률에 따라 승패의 명암이 갈리는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혁신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강한 서브가 ‘막으려는 자’의 도전이었다면 이번에는 ‘뚫으려는 자’의 응전이었습니다. 불안한 리시브 상황에서도 상대의 견고한 블로킹을 뚫을 수 있는 묘수를 찾아야 했는데 그것이 스피드배구의 출발점이 아니었을까요?

리시브 불안 시 좌우 오픈 공격 외의 돌파구를 찾아 공격 성공률을 높이고자 하는 것이 ‘스피드 배구’의 주목적인데 그 방향은 상대 블로커를 따돌릴 수 있도록 공격수 전원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공격을 ‘빠르게’, 그리고 ‘다양하게’ 시도하는 것으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스피드배구로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 선수들의 정규리그 우승 직후 환호하는  장면. 스피드배구는 개인의 능력을  극대화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어 향후 국내 배구 경기가 어떤 진화를 이룰지 기대를 모으게 한다. [사진=스포츠Q(큐) DB]

그런데 이를 위해선 선수 전원의 변신과 업그레이드는 기본 전제로 떠올랐습니다.

먼저 세터는 정해진 위치에서 이마 위로 서브리시브가 오길 기다리기 보다는 코트 안에서 서브리시브를 받아 주면 그 곳으로 민첩하게 들어가 공격수가 있는 곳으로 빠르고 힘 있게 토스를 쏘아줄 수 있는, ‘찾아가는 세터’가 돼야 했습니다. 이 때문에 큰 신장뿐 아니라 빠른 발과 힘 그리고 체력은 훌륭한 세터의 기본 자질이 됐습니다.

그에 발 맞춰 공격수 전원도 달라져야 했습니다. 공격수 숫자가 많으면 그만큼 유리하므로 전원 수비, 전원 공격의 토털배구 컬러를 갖춰갔습니다. 분업배구의 경우 수비 형 레프트는 리베로와 함께 서브리시브와 수비를 전담하고 공격에선 열외였으나 스피드배구에선 그렇지 않습니다. 공격수는 서브리시브 뒤 공격 전환에 나서고 설령 토스가 거칠어도 연타 등 해결 능력을 갖춰야 합니다. 속공과 백어택 등 여러 포지션에서 다양한 공격을 구사해야 하는 것과 함께 서브리시브와 수비에도 만전을 기해야하므로 우수한 체력과 개인기는 필수입니다.

리베로 또한 위기 시 세터 대신 토스를 해주는 등 또 다른 능력을 추가했습니다.

이처럼 스피드배구는 체력과 기술, 순발력과 집중력 등 선수 개인의 능력과 역량 극대화를 요구합니다. 리시브가 불안정한데도 C퀵(퀵 오픈)이 나오고 일명 Pipe라는 후위 시간차 공격도 등장해 배구경기를 보는 팬들의 눈요기를 만족시켜주고 있습니다.

실로 배구가 점점 달라지고 있습니다. 이미 발로 수비하는 것은 물론 전문 수비수 리베로의 호수비에 감탄하게 됐으며 랠리 포인트 시스템으로 더 흥미진진하게 바뀌었습니다. 이어 스피드배구로의 진화 -. 하지만 경기인에게 배구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만일 분업배구가 쇠퇴한다면 공격만 하고 수비는 하지 않는, 또는 수비만 하고 공격은 하지 않는 반쪽선수는 사라질 겁니다. 그렇게 되면 ‘배구 재목감’도 달라지겠지요. 태극마크를 달려면 이제 공격과 서브리시브, 수비 모두 만능이 돼야 할 듯합니다.  단지 키만 커선 안 되고 힘도 좋고 몸도 빠르고 운동 감각도 뛰어나야 하지 않을까요?

머잖아 영화 ‘소림사축구’처럼 코트 사방에서 날아다니며 그동안 선보이지 않았던 공격 기술이 춤을 추는 ‘소림사배구’가 현실화 되는 것은 아닌지 발랄한 상상을 해보게 됩니다.

배구 진화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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