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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크싱어](8) '가슴앓이' 양하영, 영향에 의한 시작과 끊임없는 배움 (인터뷰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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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크싱어](8) '가슴앓이' 양하영, 영향에 의한 시작과 끊임없는 배움 (인터뷰Q)
  • 연나경 기자
  • 승인 2016.06.17 09: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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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자 Tip!] 사람이 취하는 모든 행보에는 유기성이 있다. 모두 연결고리가 있으며, 많은 방식으로 영향을 미친다. 예술인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들이 했던 다양한 활동들이 자신이 몸담고 있는 예술을 하게 되고, 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한다. 

[스포츠Q(큐) 글 연나경 · 사진 최대성 기자] 양하영은 다양한 행보를 취했던 포크가수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힌다. 1984, 1985 KBS 가요대상 듀엣부문상 수상은 물론이고, ‘동물 평화상’ ‘한국인을 빛낸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 ‘대한민국 예능인 올스타상’ 등을 받았다.

이 외에도 콘서트 MC부터 대학 교수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그의 모든 행보는 ‘음악하는 양하영’에게 어떤 원동력이 될까? 지난 5월, 양하영을 만나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 가족들의 영향으로 시작된 음악, 그리고 두 번의 듀엣

 

어린 시절, 아이들의 성장에 가장 영향을 미치는 인물은 가족이다. 양하영 역시 그랬다. 음악을 좋아하던 부모님과 언니가 기타 악보 보는 방법을 알려줬다. 하지만 예술가에겐 재능도 필요하다. 양하영은 예술가가 될 수 밖에 없는 환경 속에 있었다.

“음악을 할 수 있는 환경이었어요. 여섯 살에 경연대회에 나가 대상을 받았고, 관계자분도 제가 어린이인 것을 아시고도 앨범을 내자고 하셨어요. 부모님이 음악을 참 좋아하셔서, 음악들을 많이 들었고 ‘기타’라는 악기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언니가 기타 책 보는 방법을 알려줬어요. 부모님의 바람은 평범하게 대학 진학해서 사는 것이었는데, 악기의 매력에 빠지면서 적성에 맞는 것을 찾은 것 같아요.”

양하영은 1983년 듀엣 ‘한마음’으로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포크가수들이 듀엣으로 나서는 행보들은 자연스러웠다. 많은 팀들이 그래왔고, 양하영 역시 솔로 가수로 시작하는 것 보다 혼성 듀엣으로 나서는 것이 더욱 괜찮다고 생각했다. ‘힘을 보태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

“혼자 할 때보다 듀엣이 좋다고 생각했고, 혼성듀엣이 낫다고 생각했어요. 둘이서 함께 곡을 썼으니까. 팀으로 활동한다는 건 고유의 색을 가지려는 마음과 같다고 생각해요. 끝까지 음악적 색깔을 고집하는 것이거든요. 음악성을 유지하려는 거죠.”

하지만 1988년 양하영은 ‘한마음’이 아닌 솔로로 출격했다. 듀엣 시절 일치했던 음악적 방향이 달라지면서였다. 그는 꾸준히 ‘촛불 켜는 밤’ ‘영원한 사랑인 줄 알았는데’ ‘가시리’ ‘세월속에’ 등 음반을 발표하고 홀로 행보를 해오다가, 2014년 백영규와 ‘엄마 그리워요’를 발표했다.

이 앨범은 어른들을 위한 동요이자 ‘물레방아’로 듀엣 활동을 했던 백영규와 ‘한마음’으로 듀엣을 했었던 양하영의 만남으로 화제를 모았다. 앞서 포크싱어 인터뷰를 진행했던 백영규는 양하영을 ‘완벽주의자’라고 언급했다.

“백영규 선배님은 제가 데뷔하시기 전부터 스타셨어요. 그 분의 음악을 듣고 자랐고, 굳이 맞춰보지 않아도 이미 곡을 다 알고 있었어요. 마다할 이유가 없었죠. 듀엣을 하셨던 분이었고, 어려움이나 거부감이 없었어요. 어른을 위한 동요이기 때문에 정말 아름다운 곡들이 담겨 있어요. 선배님이 저를 ‘완벽주의자’라고 해주신 건 정말 기분 좋은 칭찬이에요. 꼼꼼하고 차분한 편이라 우선순위를 정하고, 스케줄대로 움직이는 편이거든요.”

◆ 끊임없는 배움, “현재에 머무는 것 보다 하나씩 성실하게”

 

양하영은 현재 청운대학교 보컬전공실기 교수로 출강중이다. 그는 누군가를 가르치는 입장이지만, 학생들에게, 그리고 가요계에서 음악을 하고 있는 후배들에게 많은 것을 배운다고 설명했다.

“데뷔했을 땐 선배님들을 보고 배웠고, 이제는 후배들을 보고 배워야 해요. 계속 죽기 전까지 뭘 배우다 죽고 싶어요. 배울 게 얼마나 많아요. 포털 사이트에 질문만 해도 배우는 게 참 많은데.”

과거 양하영은 케이블 방송에서 음악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원경스님의 시집을 보고 시낭송 앨범도 발표했다. 그의 음악 인생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현재에 머무는 것보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슬럼프는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자신의 수준이 올라갔다는 것을 의미하잖아요. 부모님을 봤을 때 어른이 되면 굉장히 쉬워지는구나 생각해서 나이가 들고 싶어했는데, 한 살 한 살 나이가 들면서 어떤 선택이 옳은지 고민하게 됐어요. 슬럼프는 자기가 갖고 있는게 유지가 될 때 오는 것인데, 하나씩 성실하게 해나가면서 한 계단씩 올라가는 것이 중요해요.”

“학생들이 음악에 대해 회의감을 느낄 때 자주 찾아와요. 그 아이들에겐 제가 선배니까.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 어릴 때 느꼈던 것들인데, 최대한 느끼던 것들 위주로 이야기를 해 줘요. 특히, 가수가 안 되면 다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많이 해 줘요. 연관된 길도 있다고 조언을 합니다.”

 ◆ 양하영만의 포크 음악은? “기타로 할 수 있는 모든 음악”

 

현재의 포크음악엔 경계가 없어졌다. 포크음악이 무엇이다라고 정의하는 것보다, '아티스트의 음악 속에 포크음악이 녹아 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홍대신의 발전부터 대중가수들의 변화까지, 포크음악은 여러 사람들이 향유하는 음악이 됐다.

“예전에는 데뷔해서 음악을 하면, 장르를 나눠야 한다고 울분을 토했어요. 상을 줘도, 장르별로 상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나누면 교류가 적어지죠. 아이유가 기타를 치고, 오디션 프로그램 덕에 기타 치면서 노래하는 친구들이 정말 많아졌어요. 굉장히 좋은 현상이죠.”

포크음악의 경계가 없어진 것처럼, 양하영 역시 ‘기타’라는 악기로 포크음악을 정의했다. 구분이 필요가 없다는 의미였다. 포크의 정신은 ‘통기타’로부터 나온다는 의미였다.

“포크음악의 정의는 기타로 할 수 있는 모든 음악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사랑 밖에 난 몰라’를 불러도, 트로트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반주도, 창법도 원곡과 다르기 때문에 양하영 버전의 ‘사랑밖에 난 몰라’를 부른다는 의미였죠. 장르가 혼합된 시대이기 때문에 남의 노래를 그대로 부르는 것 보다 그 노래를 내 식으로 부르면 되는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장르의 노래가 어떤 음악이 됐건 하고싶어요. 나누려고 하는 것 보다, 그냥 내가 연주하는 음악을 꾸준히 들려주고 싶어요.”

◆ 양하영 소개

1983년 ‘가슴앓이’로 데뷔. ‘꿈이여 사랑이여’ ‘갯바위’ ‘말하고 싶어요’ ‘촛불 켜는 밤’ ‘영원한 사랑인 줄 알았는데’ ‘엄마 그리워요’ 등 히트곡 발표. 현재 청운대학교 실용음악과 교수.

[취재후기] 자신의 음악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가수였다. 또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꾸준히 배움을 실천하려는 모습이 느껴졌다. 만약 대학시절, 양하영 씨 같은 교수님을 만났다면 삶이 달라졌을까. 멋진 교수님을 둔 학생들이 부러워지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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