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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Q현장] 사춘기 소녀들에게 너무 가혹한 드래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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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Q현장] 사춘기 소녀들에게 너무 가혹한 드래프트
  • 박상현 기자
  • 승인 2014.11.11 21: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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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농구 9명·여자핸드볼 12명 대학 진학 또는 새로운 길 모색

[올림픽공원=스포츠Q 박상현 기자] 스포츠 현장에는 늘 기쁨과 슬픔이 공존한다.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아쉬움, 탄식은 경기장에서 일어나는 일상사다.

하지만 경기장에서만 희비가 엇갈리는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운동만 해왔던 어린 학생들이 실업팀 또는 프로팀으로 가는 드래프트 현장에서도 일어난다.

공교롭게도 여자프로농구와 여자실업핸드볼의 드래프트가 '막대과자 날'인 11일 4시간 간격으로 동시에 열렸다. 친구들과 함께 막대과자를 나눠 먹으며 환한 미소를 짓는 날이지만 이들은 그런 여유를 가질 수가 없었다.

여자프로농구에서는 22명의 선수가 드래프트에 참가해 13명이 뽑혔고 여자실업핸드볼은 41명의 고교 및 대학졸업예정자가 참가해 29명이 선택을 받았다.

▲ [스포츠Q 이상민 기자] 서울 여의도 63빌딩 컨벤션센터에서 11일 열린 여자프로농구 신입선수 선발회에서 프로팀의 지명을 받은 선수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대 태반이 백수라는 '이태백'의 시대에 60%의 취업률이 나쁜 편이 아니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학부모들까지 드래프트장을 찾은 상황에서 어린 여고생들이 실업팀, 프로팀에 선택을 받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는 모습은 당사자와 가족들은 물론이고 취재진들이 보기에도 무척이나 안쓰럽다.

◆ "좋아하는 핸드볼을 더이상 하지 못할 것 같아 걱정됐어요"

여자실업핸드볼 신인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네번째로 컬러풀대구의 지명을 받은 이믿음(22·한국체대)은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뽑히지 못하면 핸드볼을 그만둘까봐 고민했는데 뽑아주신 감독님께 감사하다"며 "내가 좋아하는 핸드볼을 더이상 하지 못할 것 같아 걱정됐다. 너무 떨린다. 하지만 이제부터 실업팀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돼 너무 기쁘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큼 실업 및 프로 드래프트의 현장은 긴장의 연속이다. 이믿음은 20대를 넘긴 대학선수여서 그 긴장감을 다스리는 방법을 잘 알겠지만 아직까지도 친구들과 까르르 웃으며 수다를 떠는 10대의 여고생들에게는 곤욕이 아닐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이후 순위에서 '폭탄 발언'이 나왔다.

골키퍼 심현지(19·동방고)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이대로 안뽑히면 마포대교에 뛰어들려고 했다"며 "핸드볼 인생이 끝나지 않게 해줘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 [스포츠Q 이상민 기자] 박준희(왼쪽)가 11일 서울 올림픽공원 SK핸드볼경기장 보조경기장에서 열린 여자실업핸드볼 신인 드래프트에서 부산BISCO의 지명을 받은 뒤 강재원 감독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깜짝 놀란 사회자가 "마포대교를 왜 가느냐"고 묻자 심현지는 "거기서 많이 떨어진다고 해서…"라고 말을 흐렸다. 사회자는 얼른 "물이 차다. 마포대교는 유람선을 타는 것으로 대신하자"고 재치있게 넘겼지만 여고생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그냥 흘려 듣기 어려웠다.

이를 들은 임오경 서울시청 감독은 "요즘 애들이 다 이렇다. 할 말,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감정대로 얘기한다"며 "심현지는 자기 의지가 상당히 강한 선수다. 그만큼 실업팀 가는 것이 절실했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여자프로농구나 여자 핸드볼이나 선수들의 고민은 같았다.

익명을 요구한 드래프트 참가자는 "선배들이 항상 드래프트 현장은 긴장이 흐른다고 했는데 직접 와보니 상상 이상"이라며 "내가 마음이 약한건지 아니면 사회가 너무 냉혹한건지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다. 내년에 다시 드래프트에 도전하기 위해 대학을 가야할지 고민해야겠다"고 말했다.

여자실업핸드볼 드래프트 3순위로 SK슈가글라이더스에 입단한 유소정(18·의정부여고)는 "자기 인생의 절반을 핸드볼에만 쏟아부은 친구들이다. 실업팀의 선택을 받지 못하면 어려운 상황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며 "물론 특기생으로 대학에 가는 방법이 있지만 대학 졸업 후에 드래프트에 나선다고 해서 된다는 보장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드래프트에서 떨어지면 새로운 일을 찾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 [스포츠Q 이상민 기자] 유소정(오른쪽)이 11일 서울 올림픽공원 SK핸드볼경기장 보조경기장에서 열린 여자실업핸드볼 신인 드래프트에서 SK슈가글라이더스의 지명을 받은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 대학 가는 것이 '루저'가 되어버린 구조

남자종목은 대부분 대학을 졸업하고 드래프트에 나서게 되지만 여자종목은 주로 고졸 선수들이 지명을 받는다. 실업핸드볼 역시 이전에는 한국체대 등 대학 출신 선수들이 많았지만 드래프트가 생겨난 이후에는 고교 졸업예정자들이 대거 드래프트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올해로 세번째를 맞는 여자실업핸드볼 드래프트에서도 주로 고졸예정자들이 뽑혔다. 전체 22명의 선수 가운데 대졸예정 또는 대학재학 선수들은 4명에 불과했다.

그러다 보니 여자농구와 여자핸드볼 모두 대학 진학이 '두번째 선택'이 된 기이한 구조가 됐다. 실업팀이 먼저고 대학팀이 그 다음이다. 그러다 보니 대학에 진학한 선수는 본의 아니게 '루저'로 인식되어 버렸다.

그러나 최근 여자농구계 역시 대학을 거쳐 프로에 입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분위기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프로에 입문하는 선수들이 모두 실력이나 정신력에서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스포츠Q 이상민 기자] 서울 올림픽공원 SK핸드볼경기장 보조경기장에서 11일 열린 여자실업핸드볼 신인 드래프트에서 팀의 지명을 받은 선수들이 프로팀의 지명을 받은 선수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 때문인지 여자프로농구에서는 지난해부터 대학 선수들이 뽑히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지난해의 경우 1라운드 전체 6순위로 수원대 출신 정민주가 용인 삼성에 뽑혔고 한림성심대 출신 강계리와 광주대 출신 차지영, 용인대 출신 백지은, 전주비전대 출신 차홍진 등이 드래프트에 선발됐다.

올해 역시 이수연(23·광주대), 김아름(20·전주비전대), 이윤정(22), 길다빈(21·이상 수원대) 등 4명의 선수가 뽑혔다. 이 가운데 김아름은 인천 신한은행으로 갔고 나머지 세 선수는 춘천 우리은행의 유니폼을 입었다.

1990년대 여자 실업농구 선수 출신으로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금메달 주역이기도 한 천은숙(46) 대한농구협회 심판은 "여자농구가 인기가 좋고 선수층이 두꺼웠을 때는 여고 농구와 실업 농구의 실력차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드래프트를 통해 지명을 받았다고 해서 곧바로 1군에서 뛰기 힘들다"며 "1군에서 뛰기 힘들다면 대학에서 실력과 경험을 쌓는 것이 오히려 더 좋다고 본다. 어차피 프로에 가도 1군에서 뛸 수 있는 실력이 되려면 2~3년이 걸린다"고 말했다.

이어 천은숙 심판은 "이를 위해서는 여자농구팀이 있는 대학이 더욱 많아져야 한다. 대학에서 여자팀을 만든다면 여자대학농구 리그가 운영된다면 농구를 하려는 학생들이 더욱 늘어날 것"이라며 "대학에서 기량을 쌓으면서 공부를 하게 되면 은퇴 후 진로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고 의견을 밝혔다.

▲ [스포츠Q 이상민 기자] 이윤정(왼쪽)이 11일 서울 여의도 63빌딩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여자프로농구 신입선수 선발회에서 우리은행의 지명을 받은 뒤 위성우 감독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윤정은 수원대 출신으로 프로팀의 지명을 받았다.

tankpark@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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