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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 갖고 싶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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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 갖고 싶지 않습니까?
  • 김신일 음악평론가
  • 승인 2014.11.28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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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 김신일 음악평론가] 재즈는 100년이 넘은 역사를 갖고 있다. 발생 초기에 흑인 영가(Negro Spiritual), 블루스(Blues) 형태들이 스윙 재즈(Swing Jazz)를 거쳐 전문적인 비밥 재즈(Bebop Jazz)로 발전했다.

이후 쿨 재즈(Cool Jazz), 프리 재즈(Free Jazz · 아방가르드 재즈), 재즈 록(Jazz Rock), 퓨전 재즈(Fusion Jazz)와 같이, 보다 모던한 시도가 이뤄지며 현대 음악의 리듬이나 화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렇다면 자유와 고급음악의 표상인 재즈가, 다른 음악에 끼친 영향을 떠나 고유의 장르로서 현재까지 전통이 잘 계승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계승이 잘 되지 않았다면 어떤 원인이 있을까?

▲ 1969년도에 발매된 마일즈 데이비스의 '비치스 브루(Biches Brew)' 더블앨범 재킷이다. 재즈 록을 통한 실험적 음반으로서 당시 50만장(더블앨범 100만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사진=김신일 제공]

분석에 앞서서, 재즈의 변화에 영향을 끼친 2차 세계대전과 같은 시대성이나 흐름 등은 배제하고, 대중의 재즈에 대한 접근방식의 문제와 재즈 뮤지션들의 가치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재즈 발생지인 미국에 국한된 문제로만 보지 말고, 우리 문화에도 이미 오래전부터 자리잡고 있는 한 장르로서 이 문제를 살펴보는 게 어떨까 싶다. 재즈에 관심있는 분들이라면 말이다.

미국내에서 한때(1930~1940) 춤과 트렌디 음악의 정점이었던 게 스윙 재즈다. 하지만 발생지에서도 현대 재즈는 더 이상 당시와 같은 인기는 찾기 힘들다. 비단 옛날 음악이며 춤을 추기 힘들다는 단순한 이유에서만은 아니다.

스윙 재즈 이후 현대의 재즈 록이나 퓨전 재즈도 계승 차원이 아닌 새로운 트렌드에 도전하는 흐름이 되면서 전통의 부재를 가져왔다. 이런 부분 때문에 비밥 시대를 맞은 루이 암스트롱은 팝 성향이 강한 재즈로 전향했으며 당시 점점 더 난해해져 가는 재즈의 흐름을 비판했다는 일화가 있다.

루이 암스트롱 조차 재즈를 어렵게 받아들였다면, 대중 입장에서 비밥 시대 이후의 재즈가 얼마나 어려운 음악인지를 짐작케 한다.

그렇다고 마냥 부정적으로만 볼 건 아니다. 뮤지션과 클럽들의 저변 확대가 잘된 일본의 사례로 눈을 돌려 보자.

일본의 음악은 뉴욕의 재즈 뮤지션 만큼의 그루브를 못내는 (어쩌면 동양인들의 핸디캡일 것이다) 단점은 있지만, 일본의 대중은 재즈 음반을 사고 재즈 클럽에 자주 가면서 음악을 편식하지 않는 고급 대중문화를 형성했다.

앞으로 재즈가 어떤 흐름이 될지는 모른다. 하지만 스윙의 전성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재즈의 음악성에 대한 대중의 이해도만큼은 넓어지고 이 음악이 앞으로도 지속되어야 한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그래야 재즈라는 국한된 장르뿐만 아나라 화성과 리듬 등의 '재즈스러운' 영향을 다른 장르에 접목시키고 영향도 충분히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 내가 소장하고 있는 재즈 CD들이다. 요즘같은 시대에 CD라는 미디어가 애물단지 같이도 느껴지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미디어에 대한 개인취향이 아니라 무엇을 듣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다.[사진=김신일 제공]

지금 유행하는 아이돌의 댄스곡도 좋지만 제한적으로 이런 곡만 듣는 건 문제가 있다. 음악의 편식을 반복하는 상황이 너무 안타깝다. 음악에 몸담고 있는 필자로서 대중에게 재즈를 듣는 환경을 만들어 주지 못하는 입장이 오히려 답답할 뿐이다.

재즈곡에는 창작곡도 있지만 유명한 곡을 리메이크 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그렇다면 재즈 뮤지션에게 '즉흥연주'와 '창작'은 과연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
 
재즈에서는 기존 레퍼토리를 헤드(곡의 테마가 되는 전주부분)만 유사하게 연주하고 그외 부분은 즉흥연주의 솔로 형식으로 우려먹는(?) 연주방식이 여전히 통용되고 있으며, 또한 그것이 재즈의 큰 특징 중 하나이다.

어찌보면 같은 곡이지만 즉흥연주를 창작성으로 재해석해 뮤지션들 스스로 창작성에 대한 합리화를 부여한 오류 같이도 보인다. 재즈를 부정적으로만 본다면 말이다.

마치 같은 핸드폰에 스킨을 갈아 끼워서 새로운 느낌을 받으라는 식의 강요 같은 거랄까? 하지만 재즈는 그런 억지를 강요하는 음악이 절대 아니다.

재즈 뮤지션은 '즉흥연주' 한 파트의 기교를 위해 엄청나게 오랜 시간과 각고의 노력을 투자한다. 단지 노력과 시간만이 아닌 재능과 재즈라는 고유의 특성을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

재즈 뮤지션들이 오랜 기간 피나는 고통 속에서 만들어 내는 연주는, 매우 이기적으로 보이거나 공연장에서 대중을 배려하지 않는 듯한 경우도 많다. 대중이 자신들에게 다가오기를 바랄 뿐,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해 비겁한(?) 타협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 바로 재즈 뮤지션이다.

하지만 이기적이라고 해서 자신을 위한 연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을 통해 얻은 재즈 프레이즈, 스윙감을 표현하기 위한 레이드 백, 리하모니제이션 등의 기교를 부단히 갈고 닦는다.

이들은 또 이기적으로도 보일 수 있는 진정한 자유로움을 표현하기 위해 재즈에 필요한 모든 것에 필사적으로 몰입하거나, 자신의 음악에 대한 자족감을 우선하고 때로는 우울한 기분에 젖기도 하고 철학가가 되고 싶어 하는 감성주의자들이다.

우리가 재즈 뮤지션을 보는 흔한 관점은 '자유스럽다'이지만, 실상 그들은 '진정한 자유(때론 스킬을 위한)를 위해 쉴 새 없이 물속에서 발을 휘젓고 있는 백조'와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가치관은 기존 곡을 리메이크하고 안 하고의 문제에 집착하지 않고, 매번 새롭게 연주되는 고도의 즉흥연주 능력에 커다란 가치를 집중한다고 할 수 있다.

같은 곡이지만 연주할 때마다 매번 바뀌는 즉흥연주는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그들만의 크리에이티브다. 바로 이러한 관점적 차이가 대중과 재즈 뮤지션 간에 음악적 괴리를 형성하게 만든다. 이런 데서 대중이 재즈에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 맥스 로치. 밥드럼의 개척자로서 비밥 시대의 대표적 드러머이다. 그는 1940년대에 찰리 파커, 마일즈 데이비스 등과 함께 밥드러머로 활동했다. [사진=김신일 제공]

그렇다면 이런 그들을 대중인 우리가 이해하고 다가갈 수는 없을까?  그들이 이기적인 게 아니라 재즈라는 음악의 태생 자체가 자유롭고 이기적인 것을 어쩌겠는가.

그렇게 재즈라는 장르에 대하는 막연한 접근 문제를 얘기하기 보다는, 우선적으로 재즈라는 포맷에 대한 대중의 기본적인 지식과 이해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음악의 대중성은 투자와 직결된다는 걸 우린 잘 알고 있다. 댄스 걸그룹의 한해 프로모션 비용만 해도 수십억 원을 넘고 기획자 입장의 수익 마지노선은 상상을 초월한다.

'과연 프로모션에 돈이 많이 들어간 음악은 좋은 음악이고, 투자가 안된 음악은 과연 싸구려일까'라는 흔한 질문을 한번 해 보자.

마트에서 장을 보듯, 좋고 나쁜 음악을 바구니에 선별해서 담으라는 얘기가 아니다. 음악 그 이상도 이하도 타협하지 않는 재즈 뮤지션의 순수한 정신과 그들의 각고 노력만큼은 우리가 분명 알아야 한다. 그래야 편식하지 않는 올바른 음악 문화가 정착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같은 생각은 음악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필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식상한 로망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민요를 서양권 뮤지션들이 어려워 하듯, 미국의 재즈를 우리가 쉽게 이해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정통으로 재즈를 클럽에서 연주하는 뮤지션도 많아졌지만, 굳이 재즈다운 음악이 아니더라도 장르 구분에 그다지 까칠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재즈라는 장르를 붙여줘도 괜찮을 만한 음악들도 꽤 많다.

존박, JK 김동욱. 황규영('나는 문제없어'를 부른 가수), 이동우(개그맨)와 같은 가수들의 재즈를 위한 시도는 걸그룹의 댄스음악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고무적인 느낌마저 들게 한다.

그렇게 우리가 배울 만한 것들에 대해서 배울 자세가 되어 있고, 그럼으로 인해 진정으로 자연스러운 문화가 정착될 수 있다면, 재즈와 관련한 이런 고민은 충분히 할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우리에게 있어서 재즈란, 단순히 서양의 문화를 수용하는 차원에서 머물지 않는다. 거창할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우리 음악의 미래가 걸린 '컬처의 자양분'이다. 재즈가 품고 있는 의미심장함을 우리 사회가 이해해 주면 좋겠다는 게 필자의 바람이기도 하다.

kimshinil-_-@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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