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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그날' 연산군 총애받은 박원종은 왜 중종반정을 주도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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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그날' 연산군 총애받은 박원종은 왜 중종반정을 주도했나?
  • 류수근 기자
  • 승인 2018.04.15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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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큐) 류수근 기자] 조선시대에는 2대 반정이 있었다. 제10대왕 연산군을 폐위시킨 ‘중종반정’과 광해군과 대북파를 몰아낸 ‘인조반정’이다. 1506년(연산군 12)에 일어난 중종반정은 성희안, 박원종 등이 중심이 돼 12년간 폭정을 일삼았던 연산군을 쫓아낸 정변이었고, 1623년(광해군 15)에 발생한 인조반정은 이귀, 김유 등 서인 일파가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인조를 왕위에 올린 사건이었다.

15일 오후 방송되는 KBS 1TV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중종반정은 누이를 위한 복수인가?’라는 부제 아래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중종이 왕좌에 오른 ‘중종반정’을 살펴본다.

 

 

 

‘중종반정’은 연산 12년 9월에 터졌다. 폭군 연산군이 폐위되고 제11대왕으로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이 추대됐다. 왕실의 웃어른이었던 자순대비의 승낙을 얻어 새로운 왕이 즉위했다. 자순대비로 더 잘 알려진 정현왕후 윤씨는 조선 성종의 계비로,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가 폐출된 뒤 왕비로 책봉된 인물이다. 나중에 중종이 된 진성대군과 신숙공주를 낳았다.

박원종은 중종반정의 핵심 인물이었다. 이날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박원종이 거사를 일으킨 주된 요인과 역사적 의미를 조명한다.

연산군 말, 조선은 연산의 폭정으로 민심이 흉흉해지며 그릇된 왕을 막아야 한다는 기운이 싹텄다. 대신들은 폭정보다 누가 먼저 왕을 끌어내릴지 ‘역모’에 대한 두려움과 눈치싸움에 바빴다. 박원종은 문무(文武)에 모두 유능한 이장곤이 난을 일으킬 거라는 소문에 역사적인 선택을 한다.

 

 

 

중종반정은 폭정으로 국정을 농단한 군주를 끌어내렸다는 대의명분이 뚜렷한 ‘반정’이었다. 하지만 박원종이 개인적 복수심이나 목적을 위해 반정을 주도했다는 의심도 있다. 이날 ‘역사적 그날’에서는 그 이유들을 되돌아 본다.

박원종은 왕족과 사돈을 맺은 명문가 집안의 무관으로, 성종에 이어 연산군에게도 신임이 두터웠다. 그런 그가 왜 반정을 주도했을까?

연산 12년 7월 ‘연산군일기’에는 “월산대군 부인 박씨가 죽었다. 사람들이 왕에게 총애를 받아 잉태하자 약을 먹고 죽었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월산대군 부인 박씨는 박원종의 첫째 누이로, 성종의 형수이자 연산군의 백모였다. 당시 50세가 넘는 나이였음에도 연산군과 간통했다는 추문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박원종으로서는 개인적 복수심을 불태웠을 만하다. 하지만 월산대군 부인 박씨의 죽음과 관련한 의견은 분분하다. 박원종이 반정을 정당하하기 위해 사건을 조작했다는 설까지 있다.

더욱이 박원종은 반정 이후 공신 책봉 문제로 진정성을 의심받게 된다. 책봉된 정국공신은 모두 117명이었다. 문제는 공신 중에는 박원종의 친인척이었거나 드러누워 떼를 쓰는 등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책봉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권력과 명예를 동시에 얻은 공신들은 벼슬은 물론, 면세부터 시작해서 엄청난 경제적 혜택을 얻었다.

중종 5년 4월 중종실록에 따르면 “사방에서 뇌물을 받았으며, 연산군이 쫓겨나자 궁에 있던 기생들을 데려와 첩으로 삼았다. 또한 분수에 넘치는 집과 음식으로 사치를 일삼아 당시 사람들이 그릇되게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반정 주도세력 역시 부패를 일삼았다. 결국 중종반정은 상벌도 불명확했고 적폐 청산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절반의 성공’에 그친 반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박원종은 누이를 위해 반정을 일으킨 것일까? 이렇다할 청사진도 없이 진행됐던 중종반정의 의의를 재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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