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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한류]④ '현대음악 여전사' 바이올리니스트 강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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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한류]④ '현대음악 여전사' 바이올리니스트 강혜선
  • 용원중 기자
  • 승인 2015.04.07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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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 글 용원중기자·사진 이상민기자] 재불 바이올리니스트 강혜선(54)을 두고 국내 클래식 음악 관계자들은 “안타깝다”고 말한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 이룬 대단한 업적과 인지도가 국내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가 친숙한 차이콥스키나 브람스를 연주하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아니라 낯선 현대음악을 파고드는 연주자이기 때문이다.

◆ 세계적 현대음악 작곡가 초연 50곡 넘어...지난해 佛 슈발리에 훈장 수상

필립 마누리, 파스칼 뒤사팽, 이반 페델레, 미하엘 야렐, 진은숙, 브루노 만토바니, 조르주 아페르기스 등 기라성 같은 현대음악 작곡가들은 강혜선에게 자신의 작품을 앞다퉈 헌정하거나 세계 초연을 의뢰한다. 그가 세상에 처음으로 울음을 터뜨리게 한 작품만도 50여 곡이 넘는다.

 

프랑스에서 가장 명망 있는 교육기관인 파리국립고등음악원 교수이자 대학원 총책임자로 재직 중인 강혜선이 한국을 찾았다. 서울시향 정기 시리즈인 ‘2015 아르스노바 Ⅱ’의 관현악 콘서트 ‘명상 & 신비’(7일 오후 8시 LG아트센터)에서 파스칼 뒤사팽의 바이올린 협주곡 '상승'을 아시아 초연하기 위해서다. 서울시향과는 이번이 세 번째 협연으로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을 역임한 정명훈 서울시향 예술감독과 호흡을 맞춘다.

공연 전날, 단발의 뱅 헤어에 블랙 아이템으로 온몸을 치장한 ‘인상파’ 피들러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지난해 그는 프랑스 정부가 수여하는 문화예술공로훈장 슈발리에를 수상했다. 슈발리에 훈장은 예술·문학 분야에서 공헌을 세우고 문화 보급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인사에게 주는 상이다. “생각도 못했던 거라 깜짝 놀랐다”는 강혜선은 “실패와 성공을 다 경험하며 꾸준히 커리어를 쌓아왔기에 주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 7일 ‘아르스노바’에서 뒤사팽 바이올린협주곡 ‘상승’ 아시아 초연

프랑스의 걸출한 현대음악 작곡가 뒤사팽은 2개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했다. 첫 번째는 강혜선에게 헌정한 작품이며, 이번에 연주할 ‘상승’은 서정적이면서도 빛나는 아름다움을 간직한 마스터피스다.

“워낙 서로 잘 아는 작곡가라 작품에 대한 교감이 충분히 이뤄진다. 이 곡은 어린아이가 노래부르는 듯한 나이브한 멜로디에 희로애락이 온전히 드러난다. 멜랑콜리한 정서도 있어서 한국 청중들이 쉽게 받아들이고 좋아할 것 같다.”

 

‘아르스노바’는 서울시향 상임 작곡가 진은숙이 지난 10년에 걸쳐 일궈온 현대음악 프로그램이다. 강혜선은 진은숙의 초청으로 2011년 필립 마누리 바이올린 협주곡 ‘시냅스’ 한국 초연을 하는 등 세 차례에 걸쳐 출연하며 ‘아르스노바’와 인연을 쌓아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을 중심으로 뿌리내리기 시작했던 현대음악이 한국에서도 싹을 틔워가고 있는 데 그 누구보다 충만감을 느낀다.

◆ “현대음악의 가장 큰 매력은 동시대성과 왕성한 창작활동”

“현대음악은 클래식처럼 듣고 있으면 절로 눈물을 흘리고 싶다거나 편한 음악이 아니다. 오랜 시간 학습된 음악이 아니라 청자의 본능과 감성에 맡기는 음악이다. 강렬한 비트나 실험적인 사운드를 즐기는 젊은 세대와 소통할 수 있는 현대음악이 존재하고, 불협화음을 강조하는 현대음악도 있다. 뒤사팽의 작품처럼 차분한 음악도 있다. 무엇보다 동시대성이 가장 큰 매력이다. 발전 속도가 빠른 현대사회에서 미래지향적 사고가 필요한데 현대음악이 이와 부합한다.”

연주자에게 현대음악은 클래식 음악이 요구하는 정확한 음정, 박자, 빠르기와 같은 엄격한 규칙에서 그리고 반복에서의 해방을 의미한다. 연주자가 창조해가는 매력이 무한대다. 작곡가와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며 작품을 수정하는 경우도 왕왕 있을 정도다. “새로운 곡을 연주하는 게 연주자의 의무”라고 여기며 ‘창조’를 주제선율로 연주하는 강혜선에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평범한 사람들도 하루의 일상에서 몇 번씩 창작 활동을 하게 된다. 익숙한 것, 할 줄 아는 걸 더 잘 하기 위한 반복도 중요하겠지만 급변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창조적인 활동이 굉장히 중요하다.”

 

◆ “죽어라 공부하고 연습하며 어려움 극복”

생사가 걸린 전투 치르듯 현대음악 외길을 걸어왔다. 신곡을 연주하려면 하루 8시간 이상 연습에 매달려야 하고, 곡에 대한 방대한 공부가 뒤따라야 하므로 고통스럽다. 유명 클래식 연주자처럼 돈과 명성이 뒤따르지도 않는다.

“젊은 시절, 콩쿠르에서 입상한 뒤 연주 제의가 많이 들어왔다. 여러 무대에서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7~8차례나 연주해야 했다. 두 번 하고나니 죽어도 못하겠더라. 이것저것을 찾아보다 현대음악을 알게 됐고, 나의 성향과 맞다고 판단해 20년 넘게 이 길을 걸어오고 있다. 중간에 몇 번이나 포기하려 했을 정도로 힘들었다. 매번 새 곡이니까. 죽어라 공부해야 했고, 죽도록 연습해야만 했다. 지인들은 ‘바보짓 하고 있다’는 말까지 했다.”

과거 모나코 음악 페스티벌에 참가했을 땐 연주 며칠 전에야 드라마 쪽대본 받듯 완성된 악보를 받기도 했다. 1년에 2~3곡씩 초연 의뢰가 들어오는 것도 비일비재하다. 그럴 때마다 힘에 부치지만 악착같이 연습에 매달리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그러다보니 악보를 빨리 읽을 줄 알게 되고, 테크닉과 순발력을 길러졌다. 열악한 환경이 성장의 밑거름이 된 셈이다.

◆ 파리국립고등음악원에서 후학 양성...청중이 즐길 수 있는 연주에 주력

파리국립고등음악원은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많은 이들에게 나눠주고 싶은 소망을 구현하는 터전이다. 4년 전에는 현대음악과가 신설돼 본격적인 소망 달성 프로젝트를 가동 중이다.

“솔로, 앙상블 등 철저히 실기 위주의 교육이 이뤄진다. 재능 있는 학생들이 많은데 한국 유학생들은 열정과 재능이 뛰어나다. 이들에게 ‘바흐와 모차르트를 잊어버리진 말되 앞으로 나아가라’고 강조한다. 또 ‘일단 먹어보라’고 주문한다. 먹어봐야 맛을 알듯이 자꾸 현대음악을 접하다보면 익숙해지고, 그러다보면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이런 친구들이 국내외에서 연주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다양한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다. 애들이 연습할 게 많아서 죽으려고 한다.(웃음)”

 

최근 들어 젊고 유망한 현대음악 작곡가들이 국내에서도 속속 배출되고 있다. 그들을 위한 조언을 부탁하자 돌아온 답변. “자꾸 (곡을)써라. 많이 쓰기만 하면 우리가 연주해 주겠다. 대신 진심으로 좋아해서 곡을 써야 한다”. 명쾌하다.

베테랑 연주자답게 공연이 코앞인데 긴장의 기색은 전혀 없다. “이번 레퍼토리를 어떻게 해석할 계획이냐”는 질문엔 요리에 비유하며 답변을 풀어냈다. “해석이란 게 곡에 대한 탐구, 연주자의 특성 등 여러 부분이 겹쳐서 이뤄지는데 청중의 입맛에 맞도록 양념하는 거와 같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즐기도록 만들까가 음악가에게 제일 중요하다”.

■ Who’s 강혜선?

세계 현대음악계를 이끌고 있는 강혜선은 어려서부터 음악과 건축모형 조립과 같이 뭔가를 만드는 걸 좋아했다. 피아니스트인 어머니의 추천으로 1977년 15세에 파리국립고등음악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거장 볼프강 슈나이더한, 요제프 진골드, 예후디 메뉴인 등을 사사하고 뮌헨 ARD 콩쿠르, 런던 칼 플레시 콩쿠르, 파리 예후디 메뉴인 콩쿠르에서 입상했다. 93년 파리 오케스트라 악장이 됐으나 이듬해 현대음악계 거목인 작곡가 겸 지휘자 피에르 불레즈의 눈에 띄어 프랑스가 자랑하는 현대음악 전문 실내악단 ‘앙상블 앵테르콩탕포랭’에 독주자로 합류했다.

 

이후 재능을 알아본 불레즈가 강혜선을 위해 쓴 곡들을 연주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평단은 그의 수연에 대해 “현대음악의 탁월한 해석과 연주력” “초인적 스태미너와 정확성, 투명한 소리, 음악적 창조성”이란 찬사를 안겨줬다.

파리의 예술인 거리인 마레 지구에서 싱글 라이프를 만끽하며 살고 있다.

[취재후기] 궁금했던 점 가운데 하나는 전설적인 바이올리니스트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 유명한 작곡가들과 우정을 나누며 얻은 건 무엇일까다. 그는 ‘정직함’과 ‘공부’라고 말한다. 큰 키에 워낙 개성적인 마스크라 한국인 필이 나질 않는다. 해외에서도 자신을 외국인으로 혼동한다고 스스럼없이 고백해 웃음을 자아낸다. 음악가에게 새로움이란 음악의 범주를 확장해가는 행위일 테다. 그러기 위해선 열려 있어야 하며, 틀과 방어기제를 내려놔야 한다. 그런 면에서 강혜선은 새로움을 뼛속 깊이 체화한 연주자 같다.

goolis@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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