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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구락(樂) 개론] 키 크면 정말 싱거울까? 배구인의 성향과 그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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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구락(樂) 개론] 키 크면 정말 싱거울까? 배구인의 성향과 그 배경
  • 최문열
  • 승인 2016.06.09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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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큐) 최문열 대표] “키 큰 사람은 정말 싱겁나요?”

배구기자로 활약하던 시절 주변 지인들에게 간혹 받던 질문이었다.

배구라는 종목이 스포츠 가운데 평균 신장이 가장 큰 구기 종목이어서 그런지 키 큰 사람들의 성향과 기질에 대해 강한 호기심을 드러내는 일반인들이 적지 않았다.

그럴 때면 순간 말문이 막히곤 한다. ‘예’ 또는 ‘아니오’로 간단히 답할 성질의 질문이 아닌 까닭이다. 사실 국내 배구인만의 독특한 성향은 있다. 그것은 선천적인 이유도 있을 수 있겠거니와 배구라는 종목을 하면서 후천적으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일 수 있다.

▲ 지난 시즌 시상식에 멋지게 차려입고 등장한 프로배구 남녀선수들. 키가 크고 늘씬하다보니 뭘 입어도 멋진 자태를 뽐낸다. 배구 선수하면 대나무처럼 큰 키와 매끈한 몸매를 연상하게 된다. [스포츠Q DB]

이 자리에서는 배구인의 기본 성향을 은근슬쩍 들춰보도록 할까 한다. 이것은 일부분을 전체로 착각하여 범하는 ‘일반화의 오류’일 수 있다. 지금껏 만난 배구인 일부의 성향을 전체의 모습인 양 규정하는 것은 다소 무리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살짝 열어보려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스포츠 팬들의 궁금증을 다소나마 해소시켜 주는 것이 첫 번째라면 배구인이 관찰자의 시선에 비친 자신들의 적나라한(?) 모습을 접한 뒤 더 발전적인 단계로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이 두 번째 이유다.

# 키다리 아저씨는 순도 99%의 ‘젠틀맨’

점잖음과 우직함.

지금껏 만난 적잖은 배구인(그것은 주로 남성이다. 예나 지금이나 현역에서 은퇴하고 활동하는 여성배구인은 그리 많지 않은 까닭이다.)의 성향을 뭉뚱그려 표현하기 위한 가장 적절한 어휘는 이것이 아닐까 싶다. 먼저 ‘점잖다’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 다음과 같다.

[형용사] 1. 언행이나 태도가 의젓하고 신중하다. 2. 품격이 꽤 높고 고상하다.

세상에 예외 없는 법칙이 없듯 분명 배구인 가운데에는 점잖지 않은 이들이 간혹 고개를 내밀곤 하지만 현역시절 배구를 한 경기인 출신이라면 전반적으로 그렇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들은 언제나 반듯하고 진중한 모습을 드러낸다.

이어 ‘우직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형용사] 어리석고 고지식하다.

하지만 여기서 우직함은 사전적 의미보다 훨씬 더 긍정적이다.

신영복의 수필 ‘어리석은 자의 우직함이 세상을 조금씩 바꿔갑니다’의 우직함이 그것에 더 가깝다. ‘감옥으로 부터의 사색’의 저자인 신영복은 온달산성에서 온달 장군과 평강 공주 이야기를 떠올리며 기행 수필을 썼는데 거기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를 세상에 잘 맞추는 사람’이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는 사람’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 덕분에 세상은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해 간다는 생각에 이른다.’

여기서 우직함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 뚝심과 소신이다. 배구인이 참으로 그렇다.

배구인 가운데에는 모난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자신을 과하게 드러내는 이들도 눈에 띄지 않는다. 다 같이 협력해야 완성되는 배구 종목 특성상 배려와 겸손의 덕을 익힌 것은 아닐는지, 아니면 워낙 신장이 크다보니 어디에 있든 주목을 받게 돼 그만큼 조심스럽고 신중한 몸가짐과 성향을 갖게 된 것인지 궁금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 No 스킨십, No 끈적끈적한 인간미

“배구는 나와 상대가 한데 엉키는 몸싸움이 없는 종목이다. 그렇다보니 끈적끈적함도 없다. 몸싸움을 거칠게 하다보면 서로 정 들고 친해지기도 하는데 배구는 그렇지 않다.”

한 배구인의 토로다. 경기종목 특성상 몸싸움을 하는 농구에 비해 배구는 스킨십이 없다보니 끈끈한 정(情)도, 살가운 인간미도 상대적으로 적다는 지적이다.

서로 마음이 안 맞아 갈등이 생기거나 다퉜더라도 술 한 잔 거나하게 먹고 “이 놈 저 놈”하며 속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다보면 상대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어지고 자연스레 친해지기도 하는데 배구인의 경우는 자신과 뜻이 맞지 않거나 싫으면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몸싸움이 없는 종목이다 보니 배구는 남과의 싸움보다는 자신과의 싸움에 매진하는 경향이 있다. 서브리시브와 토스 그리고 스파이크와 블로킹 등 자신이 맡은 역할의 완벽한 수행을 위해, 자기가 정해 놓은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플레이마다 혼신의 힘을 다한다. 자기 것만 잘 하면 제 몫을 완수하는 것이므로 자기완성을 위해 자신과의 싸움을 물고 늘어진다.

▲ 지난 시즌 플레이오프 미디어데이에 참가했던 프로배구 감독과 선수들. 배구 경기만의 고유한 특성 때문일까? 국내 배구인은 비슷한 성향을 나타내 흥미를 더하기도 한다. [스포츠Q DB]

# 네트로 갈라진 내 편과 네 편

“네트를 사이에 두고 내 편과 네 편으로 갈라서 상대를 누가 더 잘 속이느냐로 승부를 결정짓다보니 편 가르기와 속임수가 난무한다.”

또 다른 배구인의 ‘셀프 디스’다. 배구 경기는 여섯이 하나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스포츠다. 그렇다보니 같은 편끼리는 내 몸처럼, 내 손발처럼 가깝고 결속력이 단단하다. 하지만 같은 편끼리 결속력이 강한 만큼 다른 편과는 거리를 두기 일쑤다.

혈연과 지연, 학연으로 인맥을 쌓고 편 가르기를 하는 대한민국이 아니랄까봐 국내 배구 계 역시 파벌이 은근 심한 편이다. 그 양상은 출신 지역을 기본으로 하고 고교와 대학 출신별 인맥이 큰 줄기를 형성하고 있기도 하다.

배구 경기는 네트 한 쪽 면에서만 플레이를 한다. 상대 코트 안으로 들어가 플레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때문일까? 배구인은 남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에 조심하는 성향이 있다. 간혹 이것은 불만이 있어도 자기 위치에서 이야기할 뿐 직접 행동에 나서는 것에는 주저하는 일면과 상통한다. 일각에선 뒷말은 많지만 행동에 소극적이라며 비판을 가하기도 한다.

내 편과 네 편으로 갈라 제각각 잘 지낸다면 문제 될 것은 없다. 하지만 편을 갈라 ‘내가 하면 로맨스 네가 하면 스캔들’이라는 식으로 사사건건 갈등과 알력을 빚는다면 큰일이다. 특히 배구인이 힘을 모아야 시너지가 나는 중요한 사안에서 내편과 네 편으로 나뉘어 밥그릇 싸움을 지속한다면 이보다 더 씁쓸한 광경은 없을 듯하다.

아무튼 점잖고 우직한 배구인은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키 큰 젠틀맨’들이다.

그것이 배구라는 특성의 종목을 하면서 서서히 생긴 것인지 또는 그런 성향을 가진 이들이 배구를 하게 돼 그런 것인지, 아니면 상호 작용했는지는 더 따져봐야 한다.

어쨌거나 경기장 안에서는 네트를 사이에 두고 치열하게 싸우더라도 경기장 밖으로 나와서는 상대의 네트를 넘어 코트 양쪽을 오가며 다같이 ‘한국배구의 발전’이라는 대명제 아래 허심탄회하게 소통하고 적극 행동에 나선다면 지금보다 더 큰 성장을 이루지 않을까?

이미 배구 판의 세대교체가 이뤄지면서 그 변화의 물꼬는 시작됐는지도 모를 일이다.

고인이 된 신영복의 수필 제목이 다시금 귓가에 맴돈다.

‘어리석은 자의 우직함이 세상을 조금씩 바꿔갑니다.’

* 배구락(樂) 개론 다음 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농구와의 깊은 인연, 배구의 기원과 발전’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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