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23:04 (토)
희망을 썸타는 한국 여자 크리켓, 그들은 위대한 선구자였다
상태바
희망을 썸타는 한국 여자 크리켓, 그들은 위대한 선구자였다
  • 박상현 기자
  • 승인 2014.09.23 11: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시안게임 데뷔전서 첫승 꿈 이루지 못했지만 희망 쐈다...체대생·종목 전향선수에 주부까지, 위대한 열정

[인천=스포츠Q 박상현 기자] 한국 크리켓이 2014 인천 아시안게임을 통해 역사적인 첫 발을 내딛었다. 종주국인 영국이나 인도, 홍콩 등 예전 또는 현재 영연방국가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스포츠이지만 아직 국내에는 생소한 스포츠임에 분명하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처음 채택된 크리켓은 인천 아시안게임 출전을 계기로 남녀 대표팀이 구성됐다. 어떻게 보면 급조된 팀이긴 하지만 짧은 기간에 만만치 않은 면모를 보여줄 정도로 성장했다.

그리고 한국 크리켓의 첫 역사는 여자 대표팀에 의해 만들어졌다. 인천 아시안게임 일정상 여자 크리켓이 먼저 경기를 치르는 영광을 안았다.

물론 상대팀은 만만치 않았다. 지난 20일 중국과 첫 경기에서 선공을 통해 49점을 먼저 뽑았다. 그러나 중국에게 50점을 내주면서 아쉽게 무릎을 꿇었다.

22일 연희크리켓경기장에서 열린 홍콩과 2차전에서 내심 4강 진출을 노렸다. 하지만 수비에서 흔들리면서 92점을 내줬다. 홍콩의 선공을 제대로 막지 못하고 20엔드까지 점수를 내준 한국은 후공을 통해 만회를 노렸지만 57점을 뽑는데 그쳤다.

 

◆ 훈련기간 겨우 6개월, 외인부대가 하나의 팀으로

'한국 국적을 가진 여자로서 해외여행에 결격사유가 없는 자, 선발 즉시 활동 가능한 자, 인천아시안게임까지 모든 모집과 훈련에 참가 가능한 자. 운동선수 출신 우대'

대한크리켓협회가 한 포털의 블로그에 개설한 협회 공식 홈페이지에 지난 3월 게재한 여자 국가대표 선수 공개 모집 공고다.

운동선수 출신 우대 항목을 제외하면 사실상 열정 하나만 갖고 오라는 것과 다름 없었다. 물론 서류심사와 체력평가, 면접이라는 전형이 있긴 했지만 운동능력이 뛰어나다면 국가대표가 될 수 있는 자격은 충분했다.

지원자들은 크리켓이라는 종목이 구체적으로 뭔지도 몰랐다. 조금 아는 사람은 그저 야구와 좀 비슷한 종목이겠거니 생각했다.

전형은 급박하게 진행됐다. 선수 모집기간부터 선수 최종 선발까지 불과 보름이었다. 3월 3일부터 12일까지 신청서를 받은 후 13일 서류전형 합격자를 발표하고 면접과 실기시험을 16일에 치른 뒤 19일 최종합격자를 발표했다.

다른 종목은 이미 마무리 훈련이다, 국제대회 출전을 통한 경험 축적이다 바쁘게 돌아가고 있을 때 여자 크리켓 대표팀은 그제서야 만들어지고 있었다.

▲ 여자 크리켓 대표팀 선수들이 인천대학교 제물포캠퍼스 운동장에서 피칭머신을 활용한 타격훈련을 하고 있다. [사진=대한크레킷협회 제공]

인천대학교 제물포캠퍼스 운동장에서 16일 진행한 실기 시험은 기초체력과 기초기술 테스트, 연습경기에 걸쳐 진행됐다. 점심시간을 제외한 4시간 30분 동안 진행한 실기시험 뒤에 3분 정도의 면접을 통해 13명의 선수가 뽑혔다. 이 가운데 한 명을 제외한 12명이 모두 아시안게임에 출전했다.

여기에 소프트볼 국가대표 코치 출신인 허미진(37)과 선수 출신인 안나(27), 전직 배드민턴 강사로 지난해 10월에 크리켓에 입문한 전순명(46) 등이 합류했다. 이렇게 15명의 선수들이 여자 크리켓 대표팀을 구성했다. 좋게 말하면 '외인부대' 나쁘게 말하면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다.

◆ 크리켓이 뭔지도 몰랐던 그들, 6개월만에 대표선수로 성장

주부 전순명은 지난해 10월 인천대에서 여자 크리켓 선수를 모집한다는 플래카드를 보고 입문한 경우다. 빨랫방망이 같은 배트로 공을 치니 야구와 비슷할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배드민턴 강사였기 때문에 더 자신이 있었다.

야구와 비슷할 것처럼 보였던 그에게 크리켓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야구공보다 훨씬 딱딱한 공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타박상 등 부상이 계속 이어졌다.

크리켓의 재미에 흠뻑 빠졌던 지난 3월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그는 탈락했다. 하지만 인천크리켓협회 소속 선수로 계속 대표선수들과 함께 훈련하던 과정에서 13명의 선수 가운데 1명이 빠져 극적으로 태극마크를 달았다.

▲ [인천=스포츠Q 이상민 기자] 오인영(왼쪽)과 이진아가 22일 인천 연희크리켓경기장에서 열린 홍콩과 예선전에서 아웃을 잡아낸 뒤 환호하고 있다.

또 대표선발전에서 뽑힌 주장 오인영(25)은 단국대 체육교육과 학생이다. 골프를 전공하다가 크리켓을 하기 위해 휴학을 하고 크리켓에 전념했다. 정아람(23)은 합기도 사범 출신이고 허미진과 안나는 소프트볼에서 전향했다.

대표팀 사령탑은 10여년 전 한국에 귀화한 파키스탄 출신의 니시르 칸(45) 감독이 맡았다. 칸 감독은 오합지졸인 선수들에게 기본기부터 하나씩 가르치며 이들을 제대로 된 대표 선수로 키워냈다.

이들은 주로 인천대 제물포캠퍼스에서 훈련하다가 네팔에서 전지훈련을 하기도 했다. 처음 크리켓을 하는 것이지만 종목 특유의 재미에 흠뻑 빠졌고 기량도 쑥쑥 성장했다. 단 6개월만에 이뤄낸 변화였다.

◆ 2연패는 아쉽지만 도전만으로 그들은 선구자

중국전에서 아쉬운 패배를 당했던 선수들은 홍콩과 경기에서 만회를 노렸다. 하지만 홍콩에는 크리켓 경험이 많은 인도, 파키스탄 출신 귀화 선수가 많았다. 경험이나 기량 면에서 한국의 열세가 확연했다.

그러나 한국 선수들 역시 열정과 도전의식으로 똘똘 뭉쳐있었다. 아웃을 잡기라도 하면 서로 모여 부둥켜 안으며 기쁨을 나눴고 공이 바깥으로 넘어갈새라 부지런히 달렸다. 상대 선수가 때린 공이 굴러가 경기장 밖으로 나가면 4점을 주게 된다.

20엔드까지 6개의 아웃을 잡고 92점을 내준 한국 선수들은 아쉬운 표정이었다. 아시안게임에서 마지막 경기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실수가 종종 나왔다. 하지만 "괜찮아 괜찮아"를 연발하며 서로를 격려했고 아웃을 잡기라도 하면 환호성을 올리며 끝까지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

▲ [인천=스포츠Q 박상현 기자] 한국 여자크리켓 대표팀의 주장인 오인영이 22일 연희크리켓경기장에서 홍콩전을 마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한국의 공격에서 너무 일찍 아웃카운트가 늘어나는 바람에 92점을 넘기진 못했지만 그들은 열심히 달렸다. 홍콩 선수들이 기록하지 못했던 4점 플레이도 두번이나 기록했다.

20엔드를 모두 채우지 못하고 10아웃으로 경기를 마친 한국 선수들은 결국 이 경기가 아시안게임의 마지막 경기가 됐다.

하지만 경기장 밖으로 나와 선수단 버스를 기다리던 그들의 얼굴에는 '홀가분하다, 해냈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오인영은 "홍콩전은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 하지만 수비에서 무너졌던 것 같다. 홍콩만 이겼어도 한국 크리켓이 더욱 활성화되는 발판이 마련됐을텐데 아쉽다"며 "사실 수비가 잘됐던 경기는 중국전이었다. 중국전 때 수비를 했더라면 이겼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가장 아쉬웠던 것은 훈련기간이 너무 짧았다는 것이다. 6개월 했는데 다소 기간이 모자랐던 것 같다"며 "게다가 처음이다보니 훈련 체계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짧은 훈련기간에 이만큼의 경기력을 보여줬다는 것에 외신 기자들도 많이 놀라워 한다"고 밝혔다.

또 오인영은 "훈련할 수 있는 장소가 제대로 준비되지 않아서 어려움이 많았다. 시간 제약도 있어 밥 먹는 시간조차도 조정해야 했을 정도였다"고 훈련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 [인천=스포츠Q 이상민 기자] 한국 여자 크리켓 대표팀 선수들이 22일 인천 연희크리켓경기장에서 열린 홍콩전에 앞서 선수 소개 때 박수를 치고 있다.

이처럼 새로운 역사를 만든 여자 크리켓 대표팀은 어떻게 될까. 아직까지는 그 미래를 모른다.

오인영은 "아시안게임 이후 계획을 알지 못한다. 계속 크리켓을 하게 될지 아니면 또 다른 것을 하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며 "이제 막 시작한 비인기종목이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한국 크리켓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투자가 이뤄져야 할 것 같다"는 의견도 피력했다.

아시안게임에서는 2연패로 물러났지만 한국 크리켓 역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했다. 승자의 칭호는 얻지 못했지만 그들은 선구자로 남았다. 그들의 도전은 아름다웠고 열정이 있었기에 패배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남들은 절대 가지지 못할 영광을 안은 그들이 어쩌면 진정한 승자일 것이다.

그리고 이제 남자 크리켓의 도전도 시작된다. 여자 크리켓과 달리 남자 크리켓 대표팀은 비교적 오랜 기간 호흡을 맞추며 훈련해왔기 때문에 승리는 물론이고 금메달까지 목표를 설정했다. 여자가 처음을 장식한 한국 크리켓이 이번에는 남자 선수들에 의해 새로운 역사를 만들지 관심이 모아진다.

남자 크리켓은 오는 27일 말레이시아와 예선전을 통해 데뷔전을 갖는다.

▲ [인천=스포츠Q 이상민 기자] 한국 여자크리켓대표팀 선수들이 22일 인천 연희크리켓경기장에서 열린 홍콩과 경기에서 아웃을 잡은 뒤 환호하고 있다.

tankpark@sportsq.co.kr

도전과 열정, 위로와 영감 그리고 스포츠큐(Q)


주요기사
포토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