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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알을 깨트리고 나온 여배우 정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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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알을 깨트리고 나온 여배우 정한비
  • 용원중 기자
  • 승인 2015.02.21 14: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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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 글 용원중기자·사진 이상민기자]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 ‘디지털 삼인삼색’ 프로젝트를 통해 첫 공개된 독립영화 ‘조류인간’(감독 신연식)은 서로 다른 욕망을 좇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문학적 미스터리 안에 담아내 호평을 받았다. 이후 모스크바, 함부르크,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 페스티발 등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 잇따라 초청받았다. 여배우 정한비(29)는 영화의 포스터와 도입부를 차지하는 행운을 누렸다. 개봉(2월26일)을 앞두고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마주했다.

 

◆ 새가 되기 위해 여정에 나선 신비로운 여인 역 소화

정한비가 연기한 영화 속 한비는 새가 되기 위해 머나 먼 여정에 나서는 묘령의 여인이다. 15년 전 사라진 아내를 찾기 위해 정처 없이 떠도는 소설가 정석(김정석), 연쇄 실종자들의 행적에 관심을 보이며 정석을 돕는 소연(소이) 그리고 한의사, 약초꾼, 사냥꾼들을 만나며 한적한 시골과 겨울의 설산을 밟아간다. ‘날고 싶다’는 욕망을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묘사한 영화의 테마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인물이다.

“말도 안 되는, 쉽지 않은 소재인데 과연 관객에게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의아했으나 감독님의 독창적인 연출력을 신뢰했기에 선택했어요. 캐릭터를 어떻게 잡을 지를 고민할 때 감독님이 ‘굳이 새가 되려하지 말고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빗대서 표현해보라’고 조연해 주셨어요. 염두에 둔 채 새에 대한 공부를 많이 했어요. 다큐멘터리를 찾아보고, 동물원에 가보고, 새의 마음을 가져보려고 패러글라이딩에 도전하며 하늘을 나는 체험도 해봤죠. 그러고 나니 새가 되려는 한비의 갈망을 이해하게 됐어요.”

◆ 패러글라이딩 도전, 한겨울 산악촬영 등 고행의 연속

원래 비둘기나 새를 징그러워했다. 하지만 ‘동족’으로 받아들이려 노력한 결과 그런 공포심을 떨쳐냈다. 패러글라이딩 역시 한 번에 활공에 성공했다. 절벽을 향해 뛰어오른 뒤 지상을 조감하던 그 순간의 희열은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았다.

신연식 감독과는 영화 ‘배우는 배우다’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출연을 위해 미팅을 했는데 몸이 아파 입원하는 바람에 출연은 불발됐다. 하지만 계속 연락을 주고받다가 ‘조류인간’ 캐스팅 제안을 받게 됐다. 시나리오 작업 당시 자신을 염두에 두고 쓴 한비 캐릭터란 설명을 들었다. 만만치 않은 소재와 주제였으나 자신이 설득 당했기에 관객 역시 이해할 거라 확신하고 뛰어 들었다.

 

“자식까지 버리고 떠나온 한비의 그리움을 가져보려고 친한 언닌 집에 가서 아이의 사진을 보고, 한비처럼 일기를 쓰는 경험도 해봤어요. 아이에 대한 미안함을 마음의 짐처럼 지닌채 살아가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욕구는 내재된 갈망이자 운명이 아닐까 싶어요.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했던 제가 배우를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겠죠.”

‘조류인간’은 새 이외에도 도전의 연속이었다. 2013년 11월부터 2월까지 주로 산에서 촬영이 이뤄졌다. 체력이 약한 데다 등산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처음엔 어떻게 적응할지 걱정이 컸다. 하지만 깊고 높은 산이 아니라 큰 어려움 없이 마쳤다. 다만 날씨가 혹독하게 추워 옷을 몇겹씩 껴입고 핫팩을 붙인 채 촬영에 임했다.

◆ 대학에서 중국어 전공...뒤늦은 나이에 연기자로 ‘직진’

경상북도 포항의 보수적인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정한비는 배우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연기학원조차 없던 곳이었다. 유년기 시절부터 한문 쓰는 게 좋았기에 경기대 중문과에 진학했다. 대학 1학년을 마치고는 중국 허난성 남양의 자매결연 대학에서 1년 동안 어학연수를 했다.

“중국을 좋아해요. 사람들의 심성이 순박해 지금도 메일로 안부를 묻는 친구들이 있어요. 현지에서 ‘7번방의 선물’을 봤다고 깜짝 놀라더라고요. 후후. 한동안 중국어를 손에서 놨는데 다시 회화공부를 하려고요. 얼마 전에는 중국감독을 만났는데 5월에 영화 촬영에 들어간다고 해서 조율 중이에요.”

 

중국에서 돌아온 뒤 유명 연예기획사의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으나 불발된 뒤 22세에 처음으로 연기학원에 등록했다. 낯가림이 심하고 내성적이던 성격을 바꿔보고 싶단 생각과 친척의 권유로 성사됐다. 연기를 배우며 알 수 없는 희열과 재미에 푹 빠졌다. 이제껏 몰랐던 자신의 또 다른 얼굴을 발견했다. 그렇게 배우의 길로 들어섰다.

2009년 tvN 시트콤 ‘세 남자’에서의 백치스러운 캐릭터 정윤희로 데뷔한 그는 이승환의 ‘화양연화’ 뮤직비디오, 드라마 ‘천추태후’ ‘신기생뎐’ ‘신의퀴즈 시즌2’, 영화 ‘7번방의 선물’의 예승이 담임선생님으로 출연하며 차츰 이름을 알려나갔다. 2010년에는 첫 주연작인 일본 TBS 단막극 ‘K프로젝트(나는 이렇게 여자 테러리스트가 되었다)’의 타이틀롤 김현희 역으로 현지 시청자들과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무명의 시간은 꽤 길었다.

◆ “자연스러운 일상 연기, 털털하고 망가지는 캐릭터 원해”

“연극영화과 출신도 아니고, 늦은 나이에 배우를 시작해 고민이 많았어요. 한때는 ‘내 길이 맞을까’란 고민에 빠졌고, 부모님도 ‘헛된 꿈을 꾸는 게 아니냐’며 걱정하셨죠. 되돌아보면 유년기부터 강렬하게 뭔가를 원했던 적이 없어요. 부모님과 학교의 요구에 맞춰서 살아왔는데 처음으로 제가 너무 원하는 걸 찾았음을 깨달았죠. 이제는 돌아갈 수 없을 만큼, 다른 일은 못할 정도로 연기가 좋아졌어요.”

이상과 현실 사이에 끊임없이 고민하는 정한비에게 욕망이란 봇짐을 진채 정체성을 찾아가는 고된 여정인 ‘조류인간’은 특별한 의미일 수밖에 없다.

 

“나는 누구인지, 나에 대해 돌아보는 계기가 된 작품이죠. 주변과 가까운 사람들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준 영화이기도 하고요. 과거에 연애할 때 상대방의 행동을 고민하지 않은 채 탓하기만 했던 것도 생각나더라고요. 그만큼 이기적이었던 거죠.”

정한비는 과장되지 않은 일상의 연기, 캐릭터를 자기처럼 연기해내는 공효진과 같은 배우가 되기를 꿈꾼다. 그동안은 여리고 가는 마스크와 목소리 톤 탓에 차분한 역할을 주로 맡아왔으나 털털하고 망가지는 캐릭터, 누아르 영화에 대한 욕심도 크다. 자신의 연기 선생님인 배우 김준호가 연출한 단편영화 ‘현도가’에서 존재감 없는 못난이 여고생으로도 출연한 그는 앞으로도 단편과 장편, 독립영화와 상업영화를 오가는 ‘욕심 많은 배우’가 되겠다며 활짝 웃었다.

[취재후기] 단아한 선과 바비인형 같은 뚜렷한 이목구비를 동시에 지녔다. 동서양의 이미지가 혼재한 특별한 마스크의 이 여배우는 열망 하나만을 움켜쥔 채 한 걸음 한 걸음 연기의 길을 직진하고 있다. 신연식 감독은 “지극히 평범한 줄 알았는데 볼수록 여러 개의 자아가 있다”고 코멘트한 바 있다. 아직은 일이 고파서 연애와 결혼에도 관심이 없다는 그의 에너지가 제대로 분출되는 날이 곧 다가올 것만 같다.

goolis@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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