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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투수의 조상' 장태영, 국내 좌완 에이스의 신화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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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투수의 조상' 장태영, 국내 좌완 에이스의 신화를 쓰다
  • 신석주 기자
  • 승인 2014.05.05 10: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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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박물관 기증품을 통해 야구를 추억하다 <3>

[300자 Tip!] 2014년 국내 프로야구는 그야말로 ‘좌완 전성시대’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는 류현진을 필두로 김광현, 양현종, 장원준까지 각 팀을 대표하는 에이스는 모두 좌완 투수들이다.국내 야구 역사에서 1950년대를 풍미했던 좌완투수가 있다. ‘태양을 던지는 남자’로 불렸던 왼손 스페셜리스트 장태영이다. 한국야구위원회(KBO) 지하 1층 아카이브에는 왼손 투수의 시조 격인 장태영 씨의 소중한 추억이 담긴 물품들이 소장돼 있다. 스포츠Q는 이상일 KBO 총재 특별 보좌관의 도움을 받아 장태영 선수의 물품과 그에 대한 이야기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스포츠Q 글 신석주·사진 노민규 기자] 야구는 왼손잡이가 각광받는 스포츠다. 특히 왼손 투수는 귀한 자원으로 손꼽힌다. 이 때문에 각 구단들도 좋은 왼손 투수 찾기에 혈안이 돼 있다.

1950년대 한국 야구를 누볐던 좌완 투수가 있다. 바로 왼손 투수의 대부인 고 장태영 선생이다.  KBO 지하 1층 아카이브에는 그의 야구에 대한 애정을 고스란히 전해주는 유품들이 보관되어 있다.

특이하게도 그의 기증품은 자신의 개인 기록이나 수상 경력 등이 담긴 물품보다 그가 야구 관련 기술을 공부했던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사료를 통해 그가 야구 기술에 대해 기울였던 관심과 노력 등을 느낄 수 있었고 당시 국내 야구의 상황을 유추할 수 있었다.

▲ 일본야구 기술서를 직접 번역했던 고 장태영 선생이 남긴 50여년이 넘은 친필 원고지는 야구 역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유품 중에는 1971년 박정희 대통령으로 받은 훈장증도 있다.

◆ 야구책을 놓지 않은 ‘공부벌레’

이상일 특보는 지난해 장태영 선수의 유품을 받으러 갔을 때를 생생히 기억했다. “당시 장태영 선생 부인께서 ‘알아서 가져가’라고 우리를 방으로 안내했다. 방문을 열어보니 야구에 관련된 책들로 가득 했다. 그때 책만으로 몇 트럭을 가져온 것 같다”고 말했다.

이상일 특보는 국내 최고 선수였던 장태영 선수를 증명할 만한 물품이 많이 없다는 점을 안타까워했다. “장태영 선생은 국내 역대 투수의 계보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선수다. 국내에서 수많은 기록을 세웠고 엄청난 수상을 했지만 개인 상패나 상장 등 개인 유품들을 소장하지 않아 기증품을 가져 오면서도 진한 아쉬움이 남았다”고 설명했다.

야구 기술 관련 서적 중에는 일본어 서적도 있었다.  ‘스포츠맨의 몸 관리’, ‘일본 스포츠맨 의학’ 등을 번역한 친필 원고지도 함께 기증했다.

“장태영 선생은 일본야구 기술을 저술한 책을 직접 번역하기도 했다. 특히 50여년이 넘은 친필 원고지는 야구 기술을 익히려는 진한 노력이 담긴 귀중한 사료로 야구 역사를 공부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상일 특보는 고 장태영 씨의 친필원고에 특히 주목하고 있다.

◆ 국내 최고의 좌완 투수 ‘장태영’

1949년 제 4회 청룡기 결승전. 당시 고교 최고 맞수인 경남중 장태영과 광주서중 김양중의 맞대결은 국내 야구 역사에 손꼽힐 만한 ‘세기의 라이벌전’으로 기록되어 있다.

연장 12회까지 가는 대 혈투 끝에 경남중이 1-2로 패해 김양중의 승리로 판가름 났지만 두 투수 모두 최고의 투구를 선보이며 한국 야구 역사에 길이 남는 명장면을 연출했다.

1929년 경북 선산에서 태어난 장태영은 1944년 경남중에 입학한 뒤 해방 이후 야구부가 생기면서 야구를 처음 접했다. 이후 광주서중의 김양중과 함께 최고의 라이벌을 형성했다.

1947년 제2회 청룡기 무대부터 투수로 활약했던 장태영은 경남중(현 경남고)을 청룡기 2연패와 황금사자기 3연패로 이끌었다. 좌완 투수였던 140㎞대의 빠른 공을 앞세워 당시 최고 인기스타로 떠올랐다.

고교 졸업 뒤 서울상대에 진학한 장태영은 대학졸업 후 당시 한국 야구를 이끌었던 김양중, 박현식과 함께 육군에 입대하면서 ‘육군야구의 황금기’를 불러왔다. 당시 이들을 상대할 만한 팀이 없을 정도였다.

▲ 고 장태영 선생은 다수의 사인볼도 기증했다. 사진은 체신부 야구선수 시절 선수들의 사인이 담긴 볼(왼쪽)과 1956년 육군 야구팀 시절 1호 홈런볼(오른쪽)이다.

1960년 육군 소령으로 근무하면서 잠시 야구 곁을 떠났던 그는 야구에 대한 미련 때문에 이듬해인 1961년 교통부 야구부 조감독으로 야구계에 복귀했다. 1962년부터 10년간 상업은행 감독을 역임했다.

현역에서 은퇴한 뒤 대한야구협회 전무이사와 부회장, 아시아야구연맹 기술위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야구계를 위해 헌신했던 장태영 선생은 1999년 8년 70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취재후기] 왼손투수가 흔치 않았던 시대에 고 장태영 선생은 야구선수로서 성장하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그가 소장했던 수많은 책과 번역본이 이를 입증해 주고 있다. 그가 한국 야구 발전을 위해 노력했던 사료들이 후배 야구선수들에게 오래도록 깊은 감동으로 전달되기를 바란다.

chic423@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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