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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클립] 한국 역도, '체중차 영욕-4위 고배'의 변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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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클립] 한국 역도, '체중차 영욕-4위 고배'의 변주곡
  • 김한석 기자
  • 승인 2016.03.07 15: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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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명 110회 메달 도전, 금 3-은 4-동 4 '삼색균형'

[스포츠Q(큐) 김한석 기자] 지난달 20일 한국 스포츠는 거목을 잃었다. 해방 공간에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올림픽 메달을 품어 한국 스포츠의 자긍심을 일깨웠던 역도 선구자 김성집 옹이 97세를 일기로 별세하면서 한국 올림픽 도전사가 새삼 관심을 끌었다.  2011년 '대한민국 스포츠영웅' 명예의 전당 초대 헌액자였던 김성집이다.

태극 역사(力士) 김성집은 한국 올림픽 역사를 열었다. 하계올림피아드로선 태극기를 앞세우고 처음 참가한 1948년 런던 올림픽 남자 역도 미들급에서 합계 380kg을 들어올려 동메달을 따냈다.

여기서 IOC의 사료를 통해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팩트를 주목해보자.

후배들을 가르치다 광복된 뒤 다시 훈련을 시작해 29세 나이에 올림피아드에 데뷔한 김성집이 거머쥔 대한민국 올림픽 최초 메달리스트의 영광에는 행운이 따랐다. 1936 베를린올림픽 챔피언인 이집트의 카드르 엘투니와 같은 무게를 들었으나 그의 체중(74.8kg)보다 1.98kg 덜 나간 덕에 체중차로 동메달을 목에 걸었던 것이다.

행운도 거듭되면 실력이라고 했던가. 4년 뒤 헬싱키 대회에서 김성집이 한국 최초로 2연속 올림픽 메달리스트로 이름을 올린 것도 데자뷔. 이번에도 이집트 선수를 상대로 역시 체중차로 동메달을 따냈으니 말이다.

당시엔 한 번의 동작으로 바벨을 머리 위까지 들어올리는 인상(Snatch),  한 동작으로 일단 가슴 위까지 바벨을 들어올린 다음 허리와 다리의 반동을 이용해 머리 위로 추어올리는 용상(Clean & Jerk)  말고도 추상((Clean & Press)이라는 종목까지 모두 3개 부문 기록을 합산해 자웅을 겨뤘다. 몸을 수직으로 세우고 일체의 반동 동작 없이 가슴에 지지한 바벨을 밀어올리는 종목으로 약칭이 프레스. 신체의 반동을 활용하지 않는 용상이라고 보면 된다.

김성집은 이 프레스에서 122.5kg으로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치열한 메달 경쟁을 펼쳤다. 그 결과, 이집트의 이스마일 라갑과 같은 합계 382.5kg을 기록했는데 체중차에서 450g 가벼웠던 김성집(73.4kg)이 포디엄에 올랐다.

1956년 멜버른 대회에서 세 번째 미들급에 출전한 37세의 김성집은 5위로 3연속 입상에 실패했고 2년 뒤 스포츠행정에 뛰어들었다. 13년 7개월의 최장수 태릉선수촌장 등을 지내며 후배 태극전사들의 국제무대 도전을 지원했다.

김성집도 늦은 나이였지만 한국 역도 올림픽 최고령 출전선수는 1952년 40세 30일로 페더급에서 11위를 기록한 남수일이다.

 
 

한국 역도의 올림픽 통산 메달순위는 18위다. 1920년 처음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이후 세계 판도는 러시아(옛 소련 포함, 이하 금메달 42), 증국(29), 미국(16), 불가리아(12)이 4강을 형성해왔다.

한국은 금 3, 은 4, 동 4개로 1972년 데뷔한 13위 북한(금 4, 은 4, 동 5)보다 5계단 낮다. 2000년 채택된 여자 역도에서 한국은 금 1, 은 2개를 수확했는데 북한은 금·은·동 2개씩을 따내 강세를 보이고 있다.

15차례 올림픽에 출전한 태극 역사는 모두 74명이다. 그중 여자 역사는 10명. 110차례 메달 도전에 나서 실격은 21차례 당했다. 실격률은 19%를 기록했다. 아깝게 메달을 놓친 4위는 무려 16차례나 나왔다. 한국 역도사의 ‘안타까운 2%’다. 11개의 메달을 딴 확률(11%)보다 4위로 고배를 마신 확률(14.5%)이 더 높았으니.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에서 고광구가 플라이급에서 252.5kg을 들어 루마니아의 트라애 시하레안과 동률을 이뤘으나 체중차로 동메달을 내줘야 했던 게 대표적으로 아까운 4위 사례다.

월남한 '반공청년' 역도선수 김해남은 23세 때인 1952년 헬싱키 대회부터 4회 연속 올림픽에 출전, 한국 역도 최다 출장자로 기록돼 있는데 성적이 4-5-4-6위로 매번 메달 문턱에서 밀려났다.

올림픽 3회 출장자는 모두 9명. 김성집과 함께 1947년 고려대 역도팀 창단 멤버였던 김창희는 1948년 6위, 1952년 5위에 그쳤으나 1956년 멜버른 대회에서 마침내 라이트급 동메달을 획득, 한국 역도의 3연속 메달행진의 바통을 이었다.

황호동은 1960년부터 3연속 올림픽 무대를 밟았던 경험을 살려 1974년 아시안게임에서 ‘현역 국회의원 선수’로서 메달(은)의 꿈을 이루는 이색 도전을 보여주기도 했다,

1960년대 침체기를 거쳐 1972년 원신희가 유일하게 뮌헨 대회에 나가 7위를 기록하고는 4년 뒤엔 한 명도 올림픽에 나서지 못하는 암흑기를 맞았다. 1972년 올림픽을 끝으로 프레스가 폐지되고 인상과 용상의 합계로만 따지게 된 경기방식의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도 그 이유 중 하나다. 서방세계의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보이콧은 한국 역도가 새롭게 도약을 준비하는데 시간을 벌어준 면도 있다.

▲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한국 역도 사상 최초의 금메달을 위업을 달성하던 당시의 ‘작은 거인’ 전병관. [사진=국가기록원 제공]

한국 역도는 ‘작은 거인’ 전병관의 등장으로 전성기를 맞는다. 전병관은 1988년 서울올림픽 플라이급에서 은메달로 32년 만의 메달 계보를 이었다. 6일 뒤엔 라이트헤비급에서 이형근이 동메달을 보탰다.

전병관은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에서 마침내 한국 역도 최초로 금 바벨을 치켜들며 최초의 그랜드슬램도 완성했다. 밴텀급으로 체급을 올려 287.5kg으로 중국의 류서우빈(277.5kg)을 제치고 시상대 맨 위에 섰다.

이 시점에서 떠올려보는 인물이 지난해 45세로 고독사한 고(故 )김병찬. 한 살 위의 전병관과 동시대를 살며 한국 역도의 기대주로 주목받았던 그다. 한국 역도 최연소 올림픽 데뷔 선수다. 17세 270일에 나선 1988년 서울올림픽 미들급에서 16위에 그쳤으나 4년 뒤 체급을 올려 4위까지 도약했다.

1996년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그는 1990년 아시안게임 금메달 연금으로 생활고에 시달리다 지난해 6월 외롭게 숨져 역도계와 스포츠계를 숙연케 했다. 그 뒤 체육연금을 받고 있더라도 생활고나 장애 등으로 생계유지가 어려운 체육연금수급자에 대한 특별지원방안, 이른바 ‘김병찬법’이 마련되는 계기가 됐다.

전병관은 1996년 애틀랜타에서 올림픽 2연패를 노렸지만 자신의 장기인 용상에서 실격으로 3연속 메달 도전에 실패한 뒤 지도자로 변신, 불세출의 ‘역도 여제’ 장미란을 키워냈다. 2004년 아테네 대회에서 이배영과 장미란이 남녀 동반 은메달로 예열하더니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선 최고의 성적을 거뒀다. 장미란이 무제한급에서 326kg을 들어올려 세계신기록을 수립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남자 77kg급의 사재혁도 금메달을 따냈다.

그 기세를 몰아 한국은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남자 8체급, 여자 7체급 중 한 국가당 최대인원인 남자 6명, 여자 4명을 사상 처음으로 모두 출전시켰으나 사재혁 등 4명이 실격되고 장미란은 4위로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리우올림픽의 전망을 어떠할까. 모두 7장의 본선 티켓을 확보하는데 그쳤다. 부활을 노렸던 사재혁이 역도후배 폭행사건으로 자격정지 10년의 중징계를 받아 유력한 금메달 후보는 없다. 2020 도쿄 올림픽을 겨냥해 ‘포스트 사재혁-장미란’을 키우는 것에 비중을 둬야할 징검다리 무대다.

여자부에서는 서른살 베테랑 듀오가 8년 만의 올림픽 복귀를 통해 그나마 침체된 한국 역도의 분위기 전환을 꾀하고 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은메달리스트인 윤진희는 ‘엄마 역사’로서 새로운 도전의 길에 들어섰다. 2011년 은퇴한 뒤 결혼한 역도대표팀 후배 원정식의 런던 올림픽 도전(69kg급 7위)을 내조했다. 2014년 말 현역 복귀를 선언한 뒤 리우행을 위해 태극마크 경쟁에 나섰다.

48㎏급의 임정화는 베이징 대회에서 196kg으로 대만의 첸웨이링과 동률을 이루고도 체중이 500g 더 나가는 바람에 동메달을 놓친 한을 풀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허리부상으로 런던 올림픽을 건너뛴 그로서는 마지막 올림픽 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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