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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예술](10) 도부민, 사업가로 변신한 첼리스트… 여전한 열정 (인터뷰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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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예술](10) 도부민, 사업가로 변신한 첼리스트… 여전한 열정 (인터뷰Q)
  • 이은혜 기자
  • 승인 2016.08.06 11: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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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자Tip!] 첼로의 소리에 반하게 된 도부민은 첼리스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 미국 유학 이후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하며 음악가 삶을 살았고, 이후에는 사업가로 변신했다. 그러나 사업가로 변신한 이후에도 다양한 방면으로 음악 활동을 지속하며 음악과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있다.

[스포츠Q(큐) 글 이은혜·사진 최대성 기자] ‘공방’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다. 다양한 결과 색을 가진 나무들과 뽀얀 먼지들, 그리고 무언가를 만들고 고쳐내기 위한 도구들.

묘하게 따뜻한 느낌을 주는 공방은 왜인지 한적한 골목의 구석에 자리 잡고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첼리스트 도부민의 공방은 유동인구가 많은 서울 한복판에 자리 잡은 식당, 그 지하에 자리하고 있다.

▲ 지하 공방 앞에서 평소 애지중지하는 첼로와 함께 포즈를 취한 도부민.

악기점으로 시작한 장소가 카페로, 카페가 레스토랑으로 변화하며 자연스럽게 건물 지하에 공방이 생겨났다. 공방은 앤틱한 느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마치 동화 나라 속을 연상하게 만들었다.

◆ 첼로의 압도적인 소리… “악기 소리에 제가 빨려들어 갔어요”

도부민이 처음 첼로를 시작한 것은 중학교 시절이었다. 당시 1세대 기타 연주자 배영식 선생의 기타 연주회를 관람하게 된 도부민은 음악에 대한 큰 감흥을 느끼게 됐다. 그는 곧바로 배영식 선생에게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고, 청소년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본 후 새로운 변화를 맞이했다.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본 뒤 문화적인 충격을 받게 된 도부민은 ‘음악가의 길’을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기타로 학교에 진학할 수 없는 시대 상황으로 인해 다른 악기로 눈을 돌려야 했고, 그때 클라리넷과 첼로를 관심 있게 보게 됐다.

 

도부민이 곧바로 첼리스트가 되겠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 관심은 클라리넷에 있었다. 그러나 곧 첼로로 시선이 끌렸고, 부산의 대표적인 첼리스트 배종구 교수를 만나게 됐다.

“배종구 교수님을 처음 만나러 간 날 문 앞에서 들려오는 첼로 소리는 정말 압권이었어요. 그냥,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다가 이 악기를 사랑하게 됐어요. 그날 그 특별했던 악기 소리에 제가 빨려 들어 간 것 같아요.”

도부민이 본격적으로 첼리스트의 길을 걷기 시작한 70년대나 80년대는 시대 상황이 ‘클래식’을 즐길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현재에 비해 첼리스트들의 수 역시 현저히 적었다.

도부민은 이 시기를 ‘클래식 음악의 개척기’라고 표현했다. 경제 상황이 좋지 못했던 70년대는 음악을 하는 사람들에게 고난의 연속이었다. 음악이 좋아서 시작한 죄밖에 없을 뿐인데 경제적 곤궁 상태를 겪어야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낭만이 있던’ 시절이었다. 사회 분위기는 음악가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지만 음악을 하지 않는 일반 사람들에게 현악기 연주는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마법과도 같았다.

“몇 달 전 겨울이었어요. 이태원의 뒷골목에서 한 성악가가 MR을 틀어 두고 이태리 칸쪼네를 부르는 모습을 유심히 봤거든요. 아마 유학까지 다녀온 실력 있는 사람 같았는데 그날 그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중 잠시라도 걸음을 멈추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어요. 놀랐죠. 70년대에는 음악을 하는 게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었을지는 몰라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도 있었고 연주할 수 있는 기회도 많았거든요.”

◆ “슬럼프 이겨내기? 시간이 흐르는 대로 두는 것”

 

첼로를 시작한 도부민은 수없이 많은 기쁨을 누렸다. 자신의 첼로 연주를 듣던 부모님과 어르신들의 밝은 표정은 여전히 그의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

뿌듯한 순간은 또 있다. 처음 미국 호놀룰루 심포니 단체에 들어가 연주를 하게 됐을 때의 일이다. 도부민이 속해 있던 단체와 엠마 올리베이라가 협연을 하게 된 것이다. 엠마 올리베이라는 미국인 최초로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바이올린 부분에서 1위를 한 뛰어난 연주 실력의 소유자였다.

1983년 도부민은 엠마 올리베이라의 한국 공연을 보기 위해 세종문화회관을 찾았지만 높은 티켓 가격으로 인해 아쉽게 발길을 돌려야 했다.

“제 프로 오케스트라 첫 연주를 엠마 올리베이라와 함께 하게 된 거죠. 한국 공연 당시에는 미소년 분위기의 젊은 연주자였는데 미국에서 실제로 처음 보게 됐을 땐 이미 머리가 다 벗겨진 중년의 연주자가 돼 있었어요.”

물론, 그에게 기쁘고 뿌듯한 순간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소리에 끌려 첼로를 선택하게 된 도부민에게도 어려운 시기는 있었다. 도부민 또한 힘든 시기가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에 대해 공감했다.

  

도부민은 ‘슬럼프’에 대해 발전하지 못하고 계속 제자리에 맴도는 느낌이었다고 설명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자신이 슬럼프 기간에 느꼈던 감정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 비해 나의 음악은 세련되지 않고 뒤처져 있는 그런 느낌이 정말 싫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음악을 늦게 시작해서 테크닉 부분에서 한계가 있었거든요. 그런 기술적인 한계로 인한 슬럼프도 마음의 큰 부담이었죠. 이걸 이겨낸 방법은 그냥 자연스럽게 시간이 흘러 가는 대로 맡겨 두는 것뿐이었어요”

심지어 도부민은 첼로를 시작하고 처음 몇 년 동안은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지도 못했다. 한양대학교에 입학한 뒤에도 ‘졸업하고 무엇을 하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다. 그저 음악이 좋았고, 첼로를 연주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후 한양대학교를 졸업한 도부민은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 오케스트라에는 빈자리가 많지 않았고, 그는 미국 유학을 선택했다.

“미국에 가서 새로운 선생님을 만나고 제 첼로 연주 수준이 기초 밖에 안 된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그 전까지는 한국 학생들하고만 비교 하니까요. 음악다운 음악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거죠.”

◆ 여전히 음악을 사랑하는 음악가이자 사업가

 

첼로를 시작한 이후로 뿌듯한 순간과 어려운 순간들을 모두 겪었다. 오랜 시간동안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했고, 미국 유학 생활 도중 얻은 것들도 많은 도부민은 현재 음악보다는 사업에 집중하고 있다.

사업에 집중하고 있다고 해서 음악을 손에서 놓은 것은 아니다. 도부민은 여전히 음악을 사랑하고, 음악을 향한 열정이 있는 ‘음악가’이자 ‘첼리스트’였다.

“지금은 사업을 하고 있고, 음악 활동은 주로 교회에서 하고 있어요. 그리고 전직 오케스트라 단원들, 음대 재학생들이 함께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활동도 하고 있는데 보람 있고, 흥겨워요.”

“우선 저는 사업을 성공시키고 싶어요. 그래서 더 많은 음악 활동을 하고, 주변에 봉사하고 싶거든요. 지난달(6월)에는 구치소에서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연주를 했는데 재소자들이 좋아하던 모습을 잊을 수 없어요. 가능하면 우리 오케스트라를 더 잘 지원할 수 있게 빨리 성공하고 싶어요.”

인터뷰를 통해 도부민에게 음악을 시작하려는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없는지 물었다. 용기를 잔뜩 불어 넣어주는 답변이 돌아올 줄 알았다. 그러나 음악을 좋아해서 시작했겠지만 길이 너무 험하고, 직장 구하기가 쉽지 않으니 신중하게 시작해야 할 것이라는 다소 현실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도부민의 조언은 ‘겪어 본 사람’만이 해 줄 수 있는 현실적인 말이었다. 자신도 겪어본 일이기 때문에 같은 길을 걷는 학생들이 힘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까지 담겨 있는 발언이었다.

[취재후기] 첼로의 소리는 날카로우면서도 따뜻하다. 오랜 시간 첼로를 연주해 와서일까. 인터뷰를 통해 보여 준 그의 모습이 묘하게 첼로의 소리와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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