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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Q스페셜] 고희 맞은 배재-양정 럭비 정기전, 함께 부르는 '존중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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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Q스페셜] 고희 맞은 배재-양정 럭비 정기전, 함께 부르는 '존중의 가치'
  • 박상현 기자
  • 승인 2015.11.20 21:0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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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부터 한국럭비 밝혀온 쌍등불…해방 이후 럭비 올스타전으로 시작한 열정과 우정의 트라이

[200자 Tip!] 학교 스포츠 정기전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연세대와 고려대의 연고전(고연전)을 생각할 것이다. 야구와 축구, 럭비, 아이스하키, 농구 등 구기종목을 놓고 선의 경쟁을 벌이는 연고전을 통해 한국 스포츠가 발전해왔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대학스포츠 정기전 외에도 고등학교에도 양교의 우정을 다지는 정기전이 있다. 벌써 70년의 역사를 쌓아온 배재고와 양정고가 맞붙는 럭비 배양전(양배전)이다.

[목동=스포츠Q(큐) 글 박상현·사진 최대성 기자] 한국 럭비는 선수층도 얇고 저변도 넓지 못하다. 설상가상 올해 삼성중공업의 해체 등으로 위기를 맞고 있다.

그러나 한국 럭비가 걸어온 길을 살펴보면 자부심을 느껴도 좋다. 일제시대인 1935년 전경성축구단이 일왕컵 축구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 것처럼 럭비도 전일본고교럭비선수권에서 정상을 차지한 역사가 있다.

▲ 배재와 양정의 럭비 OB 정기전은 1945년부터 시작해 올해로 70년째를 맞았다. 한국전쟁과 군부독재시대 계엄령 선포 등으로 열리지 못한 때가 있어 59회 대회가 열렸지만 한국 럭비의 근간을 이루는 두 학교의 우정의 대결은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럭비의 고시엔'라고 불리는 하나조노 대회(전일본고교럭비선수권)에서 경성사범학교(현 서울대 사범대학)가 1930년부터 3연패를 차지했고 배재고보가 1936년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1937년에는 양정고보가 준우승을 차지하며 식민지 시대의 설움을 스포츠로 풀었다.

1930년 창단한 양정고와 이듬해 팀을 구성한 배재고는 해방 이후 한국 럭비를 이끌어온 쌍두마차였다. 양정고와 배재고를 졸업한 럭비 선수들은 1945년부터 OB 정기전을 열었고 이것이 바로 배양전의 시초가 됐다. 지금까지도 양배전의 메인 경기가 OB 정기전인 이유는 배재고와 양정고를 졸업한 선수들의 올스타전 성격으로 시작됐기 때문이다.

어느덧 고희를 맞은 배양전이 20일 서울 목동운동장에서 열렸다. 70년 역사라고는 하지만 한국전쟁과 군부독재 시절 계엄령 등으로 10차례 열리지 못했고 지난해 세월호 사고로 한 해를 건너뛰어 올해로 59회째를 맞았다. 올해는 양정고 럭비OB회 주최, 양정 중고등학교 주관으로 열려 주최측 학교가 뒤로 오는 전통대로 '전(全) 배재 대 전(全)양정 럭비 정기전' 즉 배양전으로 불렸다.

◆ 스포츠라기보다 일제에 항거하는 전쟁이었다

연세대와 고려대가 대학 스포츠를 이끈 주역이었다면 양정고와 배재고는 사실상 한국의 고교 스포츠의 역사를 주도해왔다.

양정고 출신으로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의 영웅 고(故) 손기정 선생이 있고 대한해협을 건넜던 고(故) 조오련도 있다. 또 김상식 전 서울 삼성 코치와 두경민(원주 동부) 등 농구인을 배출하기도 했다. 배재고를 졸업한 스포츠 스타는 대한야구협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그의 이름을 딴 타격상으로도 유명한 고(故) 이영민 선생이 있다.

배재고는 야구와 축구가 모두 유명해 야구인 외에도 송종국 MBC 해설위원과 최근 현역 은퇴를 선언한 차두리도 이 학교를 나왔다.

▲ 배재와 양정은 럭비라는 끈끈한 인연으로 묶여있다. 일제시대에 항거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던 럭비를 통해 일본 고교팀들을 꺾으며 전일본선수권에서 입상하기도 했다. 두 학교를 졸업한 선수들은 한국 럭비를 이끄는 주역이 돼 럭비 올스타전이나 다름없는 OB 정기전을 치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양정과 배재의 정기전은 럭비 종목만 치러진다. 두 학교가 한 운동장에서 모여 함께 응원할 수 있는 공통된 종목이라는 점도 있지만 럭비는 일제시대 일본에 항거하는 수단이었다. 양정과 배재는 일제시대 라이벌이면서도 일본에 맞서 싸우는 전우이자 동료였다.

일본을 상대로 절대로 지지 않겠다는 자존심은 결국 하나조노 대회에서 좋은 성적으로 이어졌다. 배재는 1936년 대회에서 타이베이 제일중을 9-8로 꺾고 정상에 올랐고 양정은 이듬해 결승전에서 아키타공고에 0-3으로 아쉽게 졌지만 준우승을 차지했다. 양정은 1939년과 1940년에도 4강에 들며 실력을 입증했다.

김동국 양정럭비원로회 총무는 "선배들의 말을 들어보면 일제시대 당시 럭비는 그야말로 전쟁을 치르듯 했다고 한다"며 "어떤 선배는 일본 고등학교 팀과 경기했을 때 갈비뼈가 3개나 부러진 상황에서도 끝까지 뛰었다고 한다. 또 일본 선수들을 태클할 때면 붕 날아서 복부를 향해 정면 충돌을 하기도 했었다"고 증언했다.

이는 배재고도 마찬가지였다. 이름을 밝히기를 거절한 배재 출신 90대 할아버지는 "일본과 경기는 정말 죽기살기로 싸웠다. 일제시대에 유일하게 항거할 수 있는 수단은 오직 스포츠, 그 중에서도 럭비밖에 없었다"며 "일제시대에 하나조노 대회에서 정상에 오른 감격은 배재가 갖고 있는 긍지"라고 답했다.

이처럼 일본에는 절대로 지지 않겠다는 의기투합은 끈끈한 우정으로 이어졌고 해방 이후 한국 럭비의 근간을 이루는 원동력이 됐다.

▲ 배재고 선수들이 경기가 끝난 뒤 양정중고 응원석 앞에 도열해 있다. 경기가 끝난 뒤 상대 학교 응원단 앞에서 서로의 교가를 불러주며 승리에 대한 축하와 격려의 박수를 보내는 것은 양교 정기전의 전통이다.

◆ 라이벌전이라기보다 우정의 대축제인 이유

'럭비축구협회 주최 본사 후원인 제4회 전양정 대 전배재의 정기럭비축구대회는 (이하 중략) 경기 시초부터 본 대회의 취지를 망각한 듯 스포츠맨십에 어긋나는 탈선행위가 선수간에 속출되어 일시 장내는 살기를 띤채 경기라기보다는 싸움판에 가까운 듯한 느낌을 주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한 것은 본 대회의 목적으로 보나 조선체육계를 위하여서나 일대 유감이었다' (경향신문 1948년 11월 16일자 발췌)

이 신문 기사대로라면 배양전이 두 학교의 정기 라이벌전이 된 이후 양보없는 뜨거운 경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학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반드시 승리해야 하는 라이벌전이기에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양교의 뜨거운 우정이 살아숨쉬는 것은 양배전이 갖는 전통이다.

응원에서도 색다른 광경이 연출된다. 중학교 YB, 고등학교 YB, OB 팀의 경기가 끝날 때마다 선수단은 서로 상대 학교 응원단 앞에 도열해 교가를 불러준다. 또 응원단은 선수들을 향해 상대팀의 교가로 화답한다.

또 양교 응원단도 양교 학생들 앞에서 합동응원을 펼친다. 물론 상대 학생이나 선수들을 야유하지도 않는다. 배재는 강동구에 있고 양정은 양천구에 있어 서로 서울의 반대편에 있지만 정기전을 통해 두 학교 학생들은 서로 친구가 된다.

▲ 배재와 양정 OB 대항전에서 양팀이 공을 잡기 위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양교의 럭비 정기전은 1960년대, 70년대만 하더라도 방송사가 중계를 했을 정도로 뜨거운 관심을 모았지만 지금은 그 열기가 덜하다. 하지만 양정, 배재 두 학교는 한국 럭비를 이끄는 선두주자답게 배양전을 통해 수준높은 경기를 벌인다.

강찬석 배재럭비OB 회장은 "배재와 양정, 두 학교 학생들은 음악시간에 서로 상대 학교의 교가를 배운다. 이미 중학교 1학년 때 두 학교의 교가와 응원가를 마스터한다"고 설명한다.

배재고 OB팀 일원으로 뛴 문세인 씨는 "배양전은 지기 싫다는 자존심보다 더 뜨거운 우정의 대결을 펼친다는 점"이라며 "배재와 양정은 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서로 친구가 된다. 군대에서도 사회에서도 양정 출신, 배재 출신들은 서로 같은 학교 동창처럼 살갑게 대한다. 나 역시 군대에서도 배재 출신이라고 하니까 양정 출신 선임이 잘 대해준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우정의 축제이다보니 졌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이겼다고 해서 뻐기지 않는다. 이긴 팀은 진 팀을 격려해주고 진 팀은 이긴 팀을 진심으로 축하해준다. 응원하는 학생 역시 상대팀을 축하하거나 격려의 박수를 아낌없이 보내준다.

배재고 YB 주장인 박상우는 "비록 지긴 했지만 열심히 뛴만큼 노력의 대가를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실망하지 않는다. 또 배양전은 특성상 한 팀이 몇 년 연속으로 이기는 사례가 많지 않기 때문에 내년에 이기면 된다는 생각을 한다"며 "하나는 모두를 위해, 모두는 하나를 위해라는 럭비정신과 함께 신사적인 스포츠라는 생각을 갖고 선의의 경쟁을 벌인다. 경기장에서는 악바리처럼 뛰지만 경기가 끝난 뒤에는 서로 안고 악수를 하며 우정을 나눈다"고 밝혔다.

▲ 양정 OB팀 선수들이 배양전에서 승리를 거둔 뒤 우승 트로피를 들고 환호하고 있다.

◆ 예전 같은 열기 느껴지지 않는다는 배양전, 그래도 한국 럭비의 희망

70년 역사를 자랑하는 정기전이다보니 양교의 학생들부터 머리가 희끗희끗한 원로들까지 배양전에 모두 모인다. 70년의 우정을 쌓은 양교 출신 럭비인과 동문들이 모두 모이는 화합의 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느 학교 정기전이 그렇듯 열기는 예전만 못한 것이 사실이다.

김동국 총무는 "1960년대에는 지상파 방송이 직접 중계를 하기도 했을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 정기전이 열리기 한 달 전에는 오전에만 수업하고 오후에는 응원 연습을 하며 준비했다"며 "사실 지금은 그 때만큼 열기가 뜨겁지 않아 아쉽다. 그래도 이렇게나마 재학생 후배들이 경기장을 찾아 응원을 펼쳐주는 것만으로도 반갑다"고 밝혔다.

한국에서 비인기 스포츠에 속하는 럭비 종목 경기에 많은 학생들이 모이는 이유는 애교심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국 럭비의 뼈대를 이루는 명문팀답게 경기 수준도 높다.

이상웅 대한럭비협회 회장은 "배재와 양정은 한국의 대표적인 럭비 명문학교이자 역사와 전통을 지키는 한국 럭비의 산증인"이라며 "양교의 럭비 정기전은 한국 럭비의 발전을 위한 선의의 경쟁이자 럭비의 균형적인 발전과 활성화를 위한 축제의 자리"라고 평가했다.

한국 럭비는 도약과 쇠퇴의 중요한 갈림길에 있다. 올해 초 삼성중공업의 해체로 실업팀이 줄었지만 인천 연고의 현대글로비스가 창단하기로 해 다시 한번 비인기라는 설움을 딛고 희망을 향해 뛸 준비를 하고 있다. 또 아시아 예선에서는 3위로 밀려 내년 올림픽 본선 티켓을 따내지 못했지만 내년 6월말로 예정된 올림픽 최종예선 토너먼트에 진출했기 때문에 아직 기회는 남아 있다.

이날 양정고 OB팀에서 뛴 국가대표 오윤형(한국전력)은 "한국 럭비의 선수층도 얇고 항상 어렵다고 말하지만 이는 내가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12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럭비를 하는 후배들이 좀 더 꿈을 키울 수 있도록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새로운 실업팀도 생기면서 한국 럭비가 한 단계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할 것이라는 희망이 있다. 앞으로도 양정과 배재, 두 학교에서 많은 후배들이 배출돼 한국 럭비가 더 강해질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 양정 OB팀 선수들이 배양전에서 승리를 거둔 뒤 박성영 감독을 헹가래치고 있다. 배재 역시 이날 아쉬운 패배를 당했지만 실망하지 않고 내년, 또 내후년을 준비한다.

[취재후기]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학교 라이벌전은 무수히 많다. 그리고 그 라이벌전 응원의 백미(?)는 단연 상대 학교에 대한 '디스'다. 상대에 대한 디스는 모교의 결속력을 다지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양정과 배재, 두 학교의 응원전은 상호 존중을 하면서도 뜨거운 경쟁을 벌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몸싸움이 심한 럭비라는 종목을 생각한다면 의아스러울 정도로 뜨거운 우정이 흘러 넘친다. 서로 비방하고 비난하기 바쁜 요즘 서로 존중 속에 선의의 경쟁을 벌이는 두 학교의 라이벌전은 아름답다. 다만 이처럼 전통이 있는 양교 정기전에서 선수 명단이나 점수 기록표 등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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