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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 헌신'으로 이룬 여자월드컵 16강 꿈, 이제부터는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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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 헌신'으로 이룬 여자월드컵 16강 꿈, 이제부터는 역사다
  • 박상현 기자
  • 승인 2015.06.18 15: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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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Q포커스] 각양각색 꿈이 모여 기적의 역전, 첫 16강…이젠 더 높은 목표와 올림픽 진출 도전

[스포츠Q 박상현 기자] 모두의 꿈이 하나로 모여 현실이 된 순간, 기적이 만들어졌다.

23명의 선수들이 각자 마음 속 깊이 품고 있던 꿈들이 하나가 돼 기적을 만들어냈고 이제는 더 큰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윤덕여 감독이 이끄는 한국 여자축구대표팀은 18일(한국시간) 캐나다 오타와 랜즈다운 스타디움에서 벌어진 국제축구연맹(FIFA) 여자월드컵 스페인과 E조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선제골을 내주고도 조소현(27·인천 현대제철)의 동점골과 김수연(26·화천 KSPO)의 역전 결승골로 2-1로 이겼다.

▲ 김수연(오른쪽에서 두번째)이 18일(한국시간) 캐나다 오타와 랜즈다운 스타디움에서 열린 스페인과 FIFA 여자월드컵 E조 마지막 경기에서 역전 결승골을 넣은 뒤 조소현(오른쪽), 심서연(왼쪽부터), 권하늘, 전가을, 지소연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있다. [사진=대한축구협회 제공]

한국 여자축구는 스페인전 승리로 월드컵 두 번째 출전 그리고 여섯 번째 경기 만에 첫 승을 거둠과 동시에 16강 진출을 이뤄냈다. 브라질에 0-2로 지고 코스타리카전에서 마지막 1분을 버티지 못하고 2-2로 비겨 16강 진출 가능성이 희박했던 한국 여자축구의 마지막 대반전이었다.

FIFA는 한국 여자축구의 극적인 역전을 '드라마(drama)'라고 표현했다. 스페인의 마지막 프리킥 기회에서 소니아 베르무데스의 슛이 크로스바를 때림과 동시에 주심의 종료 휘슬이 울리면서 한국이 해피엔딩 드라마의 주인공이 됐다.

◆ 세계 최고를 향해 달려가는 지소연, 자신을 죽이고 팀을 살리다

지소연(24·첼시 레이디스)은 FIFA 발롱도르 수상에 대한 욕심을 물어보면 언제나 "나는 아직 한참 멀었다"고 말한다. 이미 소속팀 감독인 엠마 헤이예스도 "잉글랜드 리그 최고의 특급 미드필더로 향후 FIFA 발롱도르를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란 찬사를 아끼지 않지만 지소연은 언제나 겸손하다.

지난 시즌 맹활약을 바탕으로 잉글랜드 최고의 여자선수에 선정됐음에도 지소연은 항상 팀을 먼저 생각한다.

외신들이 한국 여자축구대표팀을 평가하면서 지소연이 팀 전력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막힐 경우 전력이 크게 떨어진다고 분석했지만 이에 대해서도 지소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은 대표팀 23명 선수 가운데 한 명이고 한 부분일 뿐이라는 것이다.

지소연은 조별리그 3경기를 치르면서 자신의 말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했다. 지소연은 A매치 78경기에서 39골로 역대 여자대표팀 선수 최다골을 갖고 있지만 결코 득점에 욕심을 내지 않는다. 자신의 역할은 앞선 공격진에게 좋은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이라는 얘기다. 지소연의 돌파력이나 득점력이라면 욕심을 부릴 수 있지만 자제한다.

조소현의 동점골 장면에서도 지소연의 이타적인 플레이가 돋보였다. 지소연이 미드필드 지역에서 공을 잡은 뒤 몰고가지 않고 오른쪽으로 빠져 들어가는 강유미(24·KSPO)에게 빠르게 패스를 연결했다. 강유미는 이를 오른쪽 크로스로 연결시켰고 정확하게 조소현의 머리를 맞고 헤딩골이 완성됐다.

▲ 지소연(가운데)이 18일(한국시간) 캐나다 오타와 랜즈다운 스타디움에서 열린 스페인과 FIFA 여자월드컵 E조 마지막 경기에서 드리블하며 질주하고 있다. [사진=대한축구협회 제공]

지소연의 꿈은 물론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아닌 팀이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유럽리그에서 뛰며 한국 여자축구의 에이스가 된 지소연이지만 대표팀에 들어오면 공동의 목표를 향해 함께 뛰는 선수다.

자신을 최대한 죽이고 동료들의 더 좋은 기회를 만들어주면서 팀을 살려냈다. 지소연의 헌신과 희생정신이 한국 여자축구의 16강 꿈을 이뤘다.

◆ 12년 전 아픔 경험한 언니들, 동생들과 함께 꿈을 이루다

이번 대표팀에는 12년 전 미국 여자월드컵을 경험한 김정미(31·현대제철)와 박은선(29·로시얀카)이 있다. 김정미는 2003년 여자월드컵 조별리그 3경기에서 모두 골문을 지켰지만 3패라는 성적표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또 박은선 역시 고등학생 신분으로 여자월드컵이라는 큰 무대를 경험했지만 세계의 벽은 너무나 높았다.

10대의 나이에 월드컵을 처음으로 경험했던 이들에게 두 번째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김정미는 2007, 2011년 대회에 도전했지만 아시아라는 큰 우물을 벗어나지 못했다. 박은선은 방황을 계속하다가 한때 축구를 그만두기도 했다. 소속팀인 서울시청에서 자주 이탈, 축구계에서 점점 멀어져만 갔다.

하지만 이들에게 마지막 기회가 찾아왔다. 여자월드컵이 16개팀에서 24개팀 출전으로 확대되면서 아시아에 배정된 본선 티켓이 5장으로 늘어났다. 여기에 북한이 2011년 대회에서 일부 선수들의 도핑으로 출전 자격이 박탈되는 행운(?)도 함께 했다. 여자월드컵 본선 티켓이 걸린 여자 아시안컵에서는 4위에 머물렀지만 일본, 호주, 중국, 태국과 함께 당당히 월드컵 본선에 나갔다.

박은선도 여자 아시안컵 직전 대표팀에 포함되면서 다시 한번 기회를 잡았다. 박은선은 지난해 초 WK리그 감독들의 성 정체성 의심 파문에 휘말려 적지 않게 마음 고생을 했지만 이를 훌훌 털어버리고 러시아로 진출한 뒤 자신의 기량을 더욱 끌어올렸다.

▲ 박은선(왼쪽에서 두번째)와 골키퍼 김정미가 18일(한국시간) 캐나다 오타와 랜즈다운 스타디움에서 열린 스페인과 FIFA 여자월드컵 E조 마지막 경기에서 2-1로 이기고 16강 진출을 확정지은 뒤 기쁨을 나누고 있다. [사진=대한축구협회 제공]

그러나 월드컵에 출전한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어린 후배들과 함께 16강 그리고 더 높은 곳을 향하겠다는 꿈이 있었다. 김정미는 앞선 2경기에서 4실점했지만 스페인전에서는 선방을 이어가며 무너질 듯 했던 대표팀의 골문을 든든히 지켰다.

박은선 역시 자신의 마지막 월드컵 경기라고 생각하고 100% 컨디션이 아님에도 선발 출전을 강행했다. 스페인에 지면 더이상 내일이 없는데다 박은선 역시 이번 대회가 사실상 마지막 출전이다. 아무리 발목이 정상이 아니더라도 한 번도 뛰어보지 못하고 그대로 스러져갈 수는 없었다.

박은선은 출전한지 불과 30분이 지나지 않아 절뚝거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꾹 참으며 59분을 버텨냈다. 박은선이 앞선에서 스페인 수비수들과 싸워주지 않았더라면 한국 공격은 더더욱 늪에 빠졌을 것이다. 스페인 수비가 후반 중반부터 급격하게 체력이 떨어진 것도 박은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 조국에서 꿈을 이룬 강유미, 백업임에도 늘 준비하고 있었던 김수연

조별리그를 통해 가장 눈에 띄는 활약을 펼친 선수를 꼽자면 단연 강유미다. 재일교포 오무라 히로미였던 강유미는 조국에서 대표팀 선수가 되고 여자월드컵 출전과 16강 진출을 이뤄내겠다는 꿈이 있었다.

혈혈단신으로 한국으로 건너와 동산정보산업고와 한양여대를 졸업한 강유미는 만만치 않은 WK리그 생활에도 끝까지 꿈을 잃지 않았다.

드래프트를 통해 충남 일화에 들어갔지만 팀이 해체되는 아픔을 겪었다. 현대제철에서 2년을 뛴 뒤 올해 KSPO로 이적한 그는 지난 4월 러시아와 평가전 2연전을 통해 A매치에 데뷔, 8년 만에 첫 꿈을 이뤘다.

코스타리카전에서 전가을(27·현대제철)의 헤딩골을 어시스트했던 강유미는 스페인전에서도 지소연의 패스를 받아 오른쪽을 돌파한 뒤 조소현의 동점 헤딩골을 만들어내는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공격 포인트 2개는 한국 선수 가운데 유일하다.

김수연도 백업 멤버로서 늘 꿈을 잃지 않고 준비를 했기에 결정적인 역전 결승골을 뽑아낼 수 있었다. 코스타리카전에서 발목을 다쳤던 김혜리(25·현대제철)가 스페인전에서 선발로 나섰음에도 100%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하자 후반 교체로 들어갔다.

출전의 기회만 주어지면 최고의 경기력을 보여주겠다는 꿈을 품고 있었던 김수연은 찾아온 기회를 제대로 잡았다. 측면 수비를 든든하게 지켰을 뿐 아니라 활발한 오버래핑으로 극적인 역전골을 뽑아냈다. 원래 측면 공격수였던 김수연은 측면 수비수로 변신한 뒤에도 탄탄한 수비력과 공격 가담능력을 인정받았다.

김수연은 경기가 끝난 뒤 인터뷰에서 "처음에는 골이 아닌 줄 알았다. 동료들이 몰들기에 그제서야 골이라고 느낌이 들었다"며 "1분을 뛰든, 10분을 뛰든 그라운드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영광이다. 골은 정말 운좋게 들어간 것 같다"고 말했다.

◆ 여자월드컵 토너먼트는 보너스, 이제부터는 역사다

녹다운 토너먼트부터는 흔히 '보너스'라고 말한다. 브라질이나 독일, 미국처럼 여자추구 강팀이라면 우승을 목표로 하겠지만 한국은 16강이 첫 목표이고 내심 8강을 바라봤다. 그 이상이라면 '대박'이다. 그만큼 이제부터 부담은 덜하다.

8강 길목에서 만나는 상대는 프랑스다. 프랑스는 FIFA 랭킹 3위로 18위의 한국보다 한참 위다. 브라질(7위)보다도 높다. 그러나 한국은 이미 랭킹이 우리보다 위인 스페인(14위)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 브라질 역시 실수만 아니었다면 최소 비길 수 있었던 경기였다. 순위가 우리보다 높다고 해서 두려워할 것이 아니다.

윤덕여 감독은 경기가 끝난 뒤 기자회견에서 "스페인전 승리는 한국 여자축구가 한 단계 올라가는 초석이 됐다. 첫 번째 목표인 16강 진출을 이뤄내 기쁘다"며 "16강전에서 매우 강한 팀인 프랑스를 만나 도전하게 돼 기쁘다. 아직 한국은 배워야 할 것이 많지만 그라운드에서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프랑스가 강하기 때문에 오히려 도전자 입장에서 편하게 경기를 치러나간다면 의외로 경기가 쉽게 풀릴 수도 있다.

한국 여자축구는 이제 더 큰 목표를 향해 간다. 월드컵 8강 이상과 함께 올림픽 무대에 나가는 것이다. 남자와 달리 여자축구는 올림픽에서 A매치로 인정된다.

올림픽은 월드컵보다 경쟁이 더 심하다. 월드컵은 아시아에서 다섯 팀이 나가지만 올림픽은 단 두 팀만 기회를 잡을 수 있다. 내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도 마찬가지다. 내년 2월 29일부터 3월 9일까지 열리는 올림픽 최종 예선에서 호주와 중국, 일본, 북한 등과 겨뤄 2위 안에 들어야만 올림픽에 나갈 수 있다.

이와 함께 아시안게임 금메달이라는 꿈도 있다. 2010, 2014년 아시안게임에서 동메달을 따내긴 했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모자라다. 한국 여자축구는 더 큰 꿈을 꾼다. 큰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한국 여자축구에 월드컵 16강이라는 튼튼한 주춧돌 하나가 놓여졌다. 1990년 여자 대표팀이 처음 만들어진 이후 4반세기만에 큰 꿈을 하나 이뤄낸 한국 여자축구가 질주에 속도를 붙이기 시작했다.

▲ 한국 여자축구대표팀 선수들이 18일(한국시간) 캐나다 오타와 랜즈다운 스타디움에서 열린 스페인과 FIFA 여자월드컵 E조 마지막 경기에서 2-1 승리로 16강 진출이 확정되자 환호하고 있다. [사진=대한축구협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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