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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Q현장] 슬픈 우생순 종영, 10년만에 새로 막 올린 '희망의 우생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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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Q현장] 슬픈 우생순 종영, 10년만에 새로 막 올린 '희망의 우생순'
  • 박상현 기자
  • 승인 2014.10.01 23: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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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전 아픔 안겼던 일본에 통쾌한 설욕전, 8년만에 아시안게임 여자 핸드볼 우승

[인천=스포츠Q 박상현 기자]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우생순)'은 영화가 나온 이후 대한민국 핸드볼의 대명사처럼 됐다. 우생순의 말에는 열심히 싸운 한국 핸드볼의 투지에 대한 찬사이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반어법이기도 하다. '원조 우생순'의 경기 결과는 패배였기 때문이다.

한국 여자핸드볼 대표팀이 인천 아시안게임을 통해 진정한 '우생순'을 만들어냈다.

임영철(54) 감독이 이끈 한국 여자핸드볼 대표팀이 1일 인천 선학핸드볼경기장에서 열린 인천 아시안게임 일본과 결승전에서 일본에 29-19, 10점차 통쾌한 승리를 거두고 8년만에 금메달을 되찾아왔다.

한국 여자핸드볼은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당시 준결승전에서 일본을 만나 28-29로 덜미를 잡히는 바람에 결승 진출에 실패한 아픔이 있다. 결승에 올라가지 못하면서 1990년 베이징 대회 이후 6회 연속 아시안게임 금메달이라는 목표도 실패했고 메달도 획득하지 못했다.

▲ [인천=스포츠Q 최대성 기자] 2006년 카타르 도하 대회 이후 8년만에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낸 한국 여자핸드볼대표팀 선수들이 1일 인천 선학핸드볼경기장에서 열린 인천 아시안게임 여자 핸드볼 일본과 결승전이 끝난 뒤 어깨동무를 하고 빙빙 돌며 기쁨을 나누고 있다.

하지만 4년전 당시 아픔을 기억하고 있는 선수들이 함께 한 한국 여자핸드볼은 인천에서 통쾌한 승리를 거두며 통산 여섯번째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획득했다.

하나 아쉬운 것은 행복한 우생순의 장소인 선학핸드볼경기장이 내년에는 빙상장으로 개조된다는 점이다. 이미 올림픽공원 SK핸드볼경기장이라는 전용코트가 있긴 하지만 금메달을 따낸 장소가 핸드볼경기장으로 활용되지 못한다는 점은 아쉽기만 하다.

그래도 모든 선수들은 행복을 얻었고 팬들도 모처럼 통쾌함을 맛봤다.

모두가 유쾌, 상쾌, 통쾌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다.

◆ 한데볼이 뭐예요, 선학경기장에 가득 찬 관중들

한국 핸드볼을 일컫는 또 다른 말이 있다. 바로 '한데볼'이다.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에서는 뜨거운 관심을 보이다가도 막상 국내 리그에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모습을 일컫는 말이다.

역시 아시안게임에서 핸드볼은 한데볼이 아니었다. 결승전이 열린 경기장 바깥에 마련되 티켓 부스에는 경기 시작 두 시간 전부터 표를 구하기 위한 사람들이 줄지어 있었다. 표가 거의 매진됐다고 하지만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현장 판매분을 구하기 위해 온 팬들이다. 이들에게 성인 기준 2만원의 가격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이미 표를 구한 관중들은 너도나도 태극기를 흔들어댔고 응원문이 적힌 플래카드를 흔들어보이며 환호성을 질렀다. 마치 한국 축구대표팀의 A매치가 벌어지는 경기장 주변을 보는 듯 했다.

▲ [인천=스포츠Q 최대성 기자] 한국과 일본의 인천 아시안게임 여자 핸드볼 결승전이 열린 1일 인천 선학핸드볼경기장에는 빈 좌석이 없어 일부 관중들이 통로에서 서서 관전할 정도로 만원을 이뤘다. 이들은 경기가 끝난 뒤 시상식까지 남아 함께 우승의 기쁨을 나눴다.

경기장 난간에도 격문이 적힌 대형 플래카드가 붙었다. '핸드볼의 황금세대, 그대가 주인공입니다', '일본, 호로록~ 금메달, 뿌잉뿌잉', '일본을 반드시 이겨내고야 말으리' 등 재미있는 문구들이 눈에 띄었다.

이미 경기장에는 좌석이 없었고 적지 않은 관중들이 통로에 서서 경기를 지켜봤다. 국제종합대회가 아니고는 볼 수 없는 핸드볼의 또 다른 단면이다.

◆ 한일전이라 더욱 뜨거운 결승전

한 경기만 더 이기면 금메달을 딸 수 있는 결승전이라는 특징 외에도 한일전이라는 점이 더욱 관중들을 경기장으로 불러모으게 했다. '가위바위보'조차도 이겨야 한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는 한일전이다.

심판의 시작 휘슬이 울리자 전반까지는 어느 정도 팽팽한 접전이 될 것이라는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한국 관중들의 열광적인 응원이 부담이 된 듯 움직임이 둔했다.

반면 광저우 때 패배의 아픔을 기억하고 있는 선수들은 일본보다 한두발을 더 뛰었다. 필드플레이어 가운데 '맏언니' 우선희(36)와 정지해(29·이상 삼척시청)를 비롯해 김온아(26), 류은희(24·이상 인천시청), 이은비(24·부산시설공단) 등이 당시 뛰었던 멤버들이었다.

▲ [인천=스포츠Q 최대성 기자] 류은희가 1일 인천 선학핸드볼경기장에서 열린 인천 아시안게임 여자 핸드볼 일본과 결승전에서 수비를 따돌리고 점프슛을 시도하고 있다.

일본보다 더 뛰니 좋은 득점 기회가 많이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일본은 설상가상으로 슛이 크로스바를 맞고나 골대를 강타하는 등 불운까지 겹쳐졌다. 경기 시작 8분 가까이 일본은 단 한 골도 넣지 못했다.

이후 한국이 5-3으로 팽팽한 접전을 이어가던 상황에서 김온아, 류은희 등이 소나기 골을 쏟아내며 10-3까지 달아났다. 일본에게 한 골을 내줘 10-4가 된 이후에도 류은희, 이은비, 정지해, 김온아가 연속골을 넣으며 15-4까지 달아났다.

전반이 끝났을 때 점수는 17-5. 일본 코칭스태프들은 할 말을 잃었고 일본 기자들도 전반 12골차를 믿을 수 없다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 전반에 일찌감치 결정된 승리, 편안한 후반

결승전을 기자석에서 지켜본 윤경신(41) 두산 감독은 여자 선수들의 맹활약에 놀랍다는 반응이었다.

경기 시작전 "4년전 우리가 지긴 했지만 실력차는 확연히 드러난다. 7~8골차로 이길테니 두고보라"고 말했던 윤 감독은 "이런 점수차가 날 줄 몰랐다. 선수들이 단단히 벼르고 나왔다"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류은희와 김온아가 6골과 5골을 넣고 이은비와 우선희가 3골, 2골씩 넣으며 일본을 압도한 한국은 사실상 전반에 승부를 결정지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

물론 방심할 것은 아니었다. 아직 30분이 더 남았기 때문이다. 한국 선수들은 전반만큼 거세게 밀어붙이진 못했지만 12~13골차를 계속 유지해나갔다. 경기 종료 6분을 남기고 점수는 28-15로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 [인천=스포츠Q 최대성 기자] 김온아가 1일 인천 선학핸드볼경기장에서 열린 인천 아시안게임 여자 핸드볼 일본과 결승전에서 수비를 제치고 슛을 시도하고 있다.

전반까지 일장기를 흔들며 응원전을 펼쳤던 일부 일본 관중들도 너무 큰 점수차가 나자 후반 중반에 자리를 떴다. 경기 종료 3분여를 남겨놓고 다소 긴장이 풀어진 듯 연속 4골을 내줘 28-19까지 쫓겼지만 승부를 뒤집기엔 이미 점수차가 너무 컸다. 완벽하고 통쾌한 승리였다.

이날 류은희가 가장 많은 8골을 넣었고 김온아와 이은비가 5골씩 넣었다. 이번 대회를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하는 우선희도 5골을 기록하며 자신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한 우선희 "4년전 상했던 자존심 회복"

"마른 하늘을 달려 나 그대에게 안길 수만 있으면 내 몸 부서진대도 좋아 설혹 너무 태양 가까이 날아 두 다리 모두 녹아 내린다고 해도 내맘 그대 마음속으로 영원토록 달려갈거야."

경기가 끝난 뒤 선학핸드볼경기장에는 이적의 '하늘을 달리다' 노래가 울려퍼졌다. 시상식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은 관중들은 떼창을 하며 함께 승리의 기쁨을 나눴다.

또 선수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원무를 그리며 빙글빙글 돌았다. 임영철 감독을 헹가래 치는 것도 빼놓을 수 없었고 싸이의 '강남 스타일'에 맞춘 말춤도 잊지 않았다.

이 가운데 우선희는 '원조 우생순'인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은메달 획득 당시 멤버로 유일한 현역으로 뛰고 있는 선수다. 게다가 2002년 부산 대회와 2006년 도하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낸 주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에게 한가지 응어리진 것이 바로 광저우 대회 당시 일본에 져 동메달에 그친 것이었다. 이미 두차례나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땄기에 아쉬울 것이 없을 것 같았지만 4년 전의 한을 풀기 위해 조카뻘 선수들과 구슬땀을 흘렸다.

우선희는 "4년전만 생각하면 자존심이 상했는데 오늘 그 한이 풀렸다"며 "가족들과 많은 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본을 상대로 완승을 거둬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지난 4개월 동안 모든 초점을 일본에 맞추고 준비했다"며 "다른 선수들도 '지면 안된다'는 남다른 각오로 훈련했다. 응어리졌던 한을 풀었다"고 환하게 웃었다.

▲ [인천=스포츠Q 최대성 기자] 김온아가 1일 인천 선학핸드볼경기장에서 열린 인천 아시안게임 여자 핸드볼 일본과 결승전에서 수비를 제치고 슛을 시도하고 있다.

김온아는 "광저우 대회때 3등을 하고 런던 올림픽 때는 첫 경기에 다쳐서 끝까지 함께 하지 못했던 두가지 때문에 마음 고생이 있었다"며 "이 때문에 이 한을 풀고 한일전도 설욕해야 한다는 마음에 훈련도 열심히 했고 경기도 초반부터 정신차리고 했다"고 말했다.

또 김온아는 "동생(김선화)과 처음으로 큰 대회에 뛰었는데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솔선수범했다"며 "다음 올림픽에서는 금메달을 땄으면 좋겠다"고 소감을 전했다.

임영철 감독은 "4개월 동안 결승전을 예상하고 선수들과 코칭스태프들이 철저히 준비해온 결과다. 정신력은 우리나 일본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봤을 때 체력이나 스태프, 스피드 등 개인기가 좀 더 앞섰던 것 같다"고 말했다.

◆ 카자흐스탄의 또 다른 우생순

앞서 끝난 3~4위전에서도 또 다른 '우생순'이 만들어졌다. 카자흐스탄이 중국에 27-26으로 극적인 승리를 거뒀다. 카자흐스탄은 마지막 40초를 남겨놓고 1점 앞선 상황에서 수비에 들어갔고 중국이 던진 회심의 슛이 오른쪽 옆그물을 맞으면서 승리를 결정지었다.

카자흐스탄은 이날 승리로 동메달을 따내며 2006년 도하 대회 은메달 이후 8년만에 메달을 땄다. 메달을 딴 기쁨에 카자흐스탄은 원을 그려 돌며 승리를 자축했다.

이후 자신들을 지도했던 감독을 헹가래쳤다. 바로 카자흐스탄을 10년 가까이 지도하고 있는 윤태일(50) 감독이었다.

남자핸드볼에서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금메달과 1998년 서울 올림픽 은메달의 주역인 윤태일 감독은 초당약품 여자 코치와 대표팀 코치 등을 거쳐 2005년 1월부터 카자흐스탄 대표팀을 이끌어왔다. 도하 아시안게임 은메달도 그의 작품이었다.

▲ [인천=스포츠Q 최대성 기자] 이은비(21번), 정유라(5번) 등 한국 여자핸드볼 대표팀 선수들이 1일 인천 선학핸드볼경기장에서 열린 인천 아시안게임 여자 핸드볼 일본과 결승전에서 승리, 금메달이 확정된 뒤 태극기를 들고 환호하고 있다.

한국의 우승과 함께 한국인 감독이 이끈 카자흐스탄도 시상대의 한 부분을 차지했다.

윤태일 감독은 "광저우 아시안게임 때는 한국, 일본, 중국에 큰 점수차로 졌었는데 인천에 와서 지긴 했지만 근소한 점수차였고 중국을 꺾고 동메달을 땄다"며 "카자흐스탄 선수들이 예전에 비해 기량도 많이 올라왔고 이번 대회를 통해 큰 자신감을 갖고 간다. 열심히 뛴 선수들에게 고맙다"고 밝혔다.

◆ 막판에 눈물 흘리던 우생순은 없다, 세계 최강 한국 핸드볼이 있다

윤태일 감독은 경기가 끝난 뒤 기자회견에서 한국 핸드볼에 대해 의미심장한 평가를 남겼다.

윤 감독은 "한국 핸드볼이 세계적인 수준인 것은 분명하지만 언제나 마지막 5분 또는 10분을 남겨놓고 체력이 떨어져 지는 경우가 많았다"며 "기술적인 면에서는 한국을 따라올 나라가 없지만 언제나 체력적인 면 때문에 우승 문턱에서 좌절하곤 했다"고 말했다.

이어 윤 감독은 "최근 한국 핸드볼이 각종 국제대회에서 다시 도약하고 있는 것은 웨이트 트레이닝을 착실히 하기 때문"이라며 "기술을 모두 갖추고 체력을 키우는 등 세계 최강의 조건을 갖춘 팀 가운데 아시아에서는 한국이 유일하다"고 말했다.

이렇듯 한국 핸드볼도 이제 달라지고 있다. 이미 연령별 국제대회에서 어린 선수들이 우승 또는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두고 돌아오는 것만 봐도 그렇다. 체력이 막판에 떨어져서 앞서가던 경기를 역전당하는 예전의 모습은 더이상 없다.

이제 '우생순'은 더이상 한국 핸드볼의 슬픈 단면을 보여주는 대명사가 아니다. 2004년에 시작한 '우생순'이 아쉬움과 아픔만 있었던 슬픈 드라마였다면 10년만에 새롭게 시작한 '우생순 시즌 2'는 영광과 희망이 있는 행복한 드라마다. 그 첫 장이 선학핸드볼경기장에서 막을 올렸다.

▲ [인천=스포츠Q 최대성 기자] 한국 여자핸드볼대표팀 선수들이 1일 인천 선학핸드볼경기장에서 열린 인천 아시안게임 여자 핸드볼 일본과 결승전이 끝난 뒤 시상식의 제일 높은 곳에 서 환호하고 있다.

tankpark@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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