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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상징주의를 만났을 때 예술성의 마지노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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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상징주의를 만났을 때 예술성의 마지노선은?
  • 김신일 음악평론가
  • 승인 2015.04.02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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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서 바라본 음악의 형이상학적 가치' (上)

[스포츠Q 김신일 음악평론가] 전세계 베스트셀러 소설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1987)'에는 비틀즈의 '노르웨이 숲'을 포함, 여러 클래식 곡들이 언급되어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하루키는 재즈와 클래식 마니아로, 그의 소설 속에 음악을 자주 등장시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조금은 어렵거나 상징주의적인 문체에서 음악이라는 장치는 독자로 하여금 더욱 더 풍부한 상상과 여운을 배가시키는 오브제로 활용되고 있다.

19세기 말 샤를 보들레르와 함께 프랑스 상징운동의 대표자로 일컬어지는 시인 '폴 베를렌'은 음악의 기법을 이용하여 주술적 언어로 시를 표방했다.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는 시를 쓰는데 있어서 기존에 쓰여진 구성법을 버리고 음악에서 사용되는 언어의 순수 리듬을 찾고자 노력한 것으로도 전해진다.

그의 작품 중 '목신에의 오후'를 음악의 형식과 기법에 구애받지 않은 인상주의 음악의 선구자인 드비쉬가 재해석하여 탄생한 작품이 그 유명한 '목신에의 오후 전주곡'이다.

또 다른 인상주의 작곡가인 '모리스 라벨'은 말라르메의 '백조의 소네트'에서 서술한 기법을 자신의 음악에 재현하고자 노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상징체계는 예술의 차원을 확장했지만 한편으로는 대중성과 예술성의 논쟁거리를 만들었다. [사진= 김신일 제공]

문학과 음악의 관계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상징주의(象徵主義)는 19세기 말 프랑스 서정시 중심에서 파생된 문예사조의 일종이며, 당시 작가들은 쇼펜하우워, 칸트와 같은 철학자들과 상호 교류하며 사상을 발전시켰다.

이 상징주의 의식은 예술의 표현에 있어서 가시적 관점이 아닌 작가의 비가시적인 내면을 암시하는 태도나 경향을 말하는데, 표상주의(表象主義)라고도 불리운다.

음악가들은 1세기 이상 이런 의식구조를 통해 내면적인 신비한 상징체계를 보여주었다. 이런 시대적 흐름 아래 형성된 작가의 사상과 의도를 음악이라는 매체를 통해 투영하려는 의지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상징주의를 표현하려는 각종 예술가들의 그 상징성에 대한 체계는 매우 주관적이라서 예술 범주에 보편적인 잣대로 삼기에는 모호한 문제가 있다.

대중은 예술의 가치를 논할 때 '보편성'을 우선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그렇지 않은 다소 난해한 작품에 대해서는 썩 관대하지 않은 측면이 있다.

반면 상징체계를 예술가들의 내면적이고 신비로운 세계관으로 보고 미시적 관점에서나마 수용하는, 이른바 '마니아' 대중들도 소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대중들에게 감흥을 불러 일으키는 훌륭한 예술 작품이라고 치부하기 어려운 것은 수용층이 다수의 대중이 아닌 소수라는 데 있다.

모든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이 지나친 보편성으로 저평가되지 않는 작품을 만들기 원한다. 하지만 작품이 난해하다면 다수의 대중이 받아들이기 어려워지기에 가상의 예술 잣대를 정하고 적정선(?)을 지켜야 한다. 그렇게 예술가들의 사명감은 딜레마와도 같은 것이다.

이렇게 인간들의 각각 관점이 다른 세계관으로 인해 예술의 가치를 논하는 데 발생하는 논쟁거리는 현재도 여전하다. 예술을 표현할 때 형이상학적 관점의 선이 어디부터이고, 대중이 이해하기 힘든 난해의 정도는 얼마부터인지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음악을 무턱대고 저평가할 수 없다. 대중문화의 주체는 바로 대중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은 난해할지언정 음악가의 내면을 대변하는 음악이라면 예술작품으로서 충분히 존립가치가 있다. 물론, 지극히 대중적인 음악들과 조화로운 공존을 이루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대중문화 확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는, 예술성과 대중성의 잣대로 삼을 만한 가상의 마지노선을 결정할 몫과 대상이 누구인지에 대한 단순한 질문과 대답을 끊임없이 이어왔다.

음악을 가치있는 진정한 실체로 만들기 위한 예술가들의 '내면의 공감각'은 대중들에게 다양하고 심층적인 사고를 유발해 풍부한 상상의 울림과 감상에 젖게 한다.

영화나 글을 접할 때 작품의 주제에 대한 관점보다는 작가의 의도를 느끼고 싶을 때가 있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단순한 '사운드'에서 확장된 '음악 속의 문학'을 통해 음악인들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되새기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것이 진정한 대중과 음악가들의 '문화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볼 수 있다.

문학의 '글'과 음악의 '사운드'는 예술의 실체라기보다 작가의 생각을 전달하기 위한 기본적인 장치에 가깝다. 대중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풍부한 상상과 무한한 여운을 남기기 위해서 예술가들은 끊임없는 고뇌를 반복하고 그것을 담기 위해 펜과 종이와 씨름한다.

이처럼 예술의 가치를 높이려는 예술가들의 부단한 노력에 그것을 수용하는 대중들의 의식이 함께할 수 있다면 대중문화는 고차원적으로 고양될 것이 분명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비로소 예술은 인간 삻의 행복 조건에 진정한 탐미와 향유를 느끼게 하는 문화의 근간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책과 음악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찰나와 같은 빠른 영감으로 캡처하는 것이 아니라 찬찬히 되새기는 여유로움이 필요하다.

만물이 생동하는 봄의 중심에 다가서고 있다. 음악이 진정한 마음의 평화의 매체로서 헛되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새삼 문학적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는 계절이다.

kimshinil-_-@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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