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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축구 월드컵 모의고사,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보았다 [SQ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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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축구 월드컵 모의고사,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보았다 [SQ현장]
  • 민기홍 기자
  • 승인 2015.06.08 12: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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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인 14명 포진 사회인팀 상대로 8점차 패배, "차라리 잘 됐다" 한목소리

[300자 Tip!] 미식축구월드컵으로 불리는 제5회 국제미식축구연맹(IFAF) 미식축구 월드챔피언십 개막이 한 달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대한체육회 가맹단체 종목이 아니어서 국비지원을 받지 못하는 한국 미식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들은 200만원씩 자비를 들여 다음달 초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지난 1월 30일 1차 소집을 시작으로 다섯 차례의 합숙훈련을 가진 대표팀이 지난해 4월 아시아 예선 쿠웨이트전 이후 14개월 만에 마침내 출정경기를 겸해 실전을 치렀다. 상대는 외인들이 대거 포진한 사회인팀 EC 골든 이글스. 그런데 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모의고사에서 산뜻한 승리를 거두고 미국으로 향하려던 대표팀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어찌보면 더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대구=스포츠Q 글 민기홍·사진 강진화 객원기자] “딱 한 달 남았다. 저런 친구들과 사흘 간격으로 경기해야 한다. 할 수 있겠나!”

백성일 대표팀 감독이 목소리를 높였다.

태극마크를 달고 나선 처음이자 마지막 모의고사였다. 축제 분위기에서 월드컵 출정식을 치르려던 계획은 모두 물거품이 됐다. 경기 후 시상식, 국가대표 선수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환호하는 골든 이글스 선수들을 지켜봐야만 했다.

▲ 한국 미식축구대표팀 선수들이 7일 골든 이글스와 최종평가전에 앞서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한국 미식축구대표팀이 따끔한 예방주사를 맞았다. 다음달 8일 미국 오하이오주 캔턴에서 개막하는 제5회 국제미식축구연맹(IFAF) 미식축구 월드챔피언십에 출전하는 한국은 7일 대구 경북대학교 대운동장에서 열린 최종평가전에서 사회인팀 EC 골든 이글스에 20-28로 패했다.

월드챔피언십에는 한국을 비롯해 미국, 일본, 멕시코, 프랑스, 호주, 브라질 등 7개국이 참가한다. 프랑스, 호주, 브라질과 B조에 속한 한국은 내심 4강 합류를 노리고 있다.

결과만 놓고 보면 비상사태다. 4강 신화를 꿈꾸는 팀이 사회인팀에 덜미를 잡혔으니. 하지만 선수들은 백성일 감독의 다그침에 정신을 바짝 차렸다. 국내에서 당한 일격은 독이 아니라 약이라며 하나되어 파이팅을 외쳤다. 미식축구대표팀이 발견한 희망은 어떤 것일까.

▲ 한국은 14개월 만에 실전을 치렀다. 사회인팀을 상대로 하는 평가전이었기에 낙승이 예상됐지만 경기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 고조된 분위기, 승리는 출정식 시나리오의 완성이었지만 

경기 전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경기 시작 3시간 30분 전인 오전 10시 30분부터 속속 운동장으로 모여든 대표선수들은 새로 지급받은 붉은 ‘K’ 스티커를 헬멧에 붙이며 필승을 다짐했다. 지난해 4월 아시아 예선 쿠웨이트전 이후 무려 14개월 만에 치르는 실전이었다.

월드컵 출전을 위해 장기 하계휴가를 내려는 대기업 사원인 디펜시브 라인맨 조지웅은 “조직력을 극대화시키는 것에 초점을 두겠다. 승리할 것이라 확신한다”며 “안 하면 하고 싶어 미치는 것이 풋볼이다. 좋은 모습을 보여 반드시 최종엔트리에 들고 싶다”고 힘주어 말했다.

김성훈은 풋볼에 인생을 걸었다. 평균 연봉이 높은 제약영업직을 그만뒀고 여자친구와도 이별했다. 그는 “여태껏 준비한 작전들이 얼마나 들어맞는지 확인할 때가 왔다”며 “실직, 이별로 슬퍼할 겨를이 없다. 아무나 달 수 없는 태극마크다. 국가대표의 자긍심과 긍지를 갖고 임하겠다”고 다짐했다.

▲ 주장 이동환(오른쪽 첫 번째)을 비롯한 국가대표 선수들이 애국가가 흘러나오자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재일교포 3인의 합류도 큰 기대감을 품게 하는 요소였다. 일본 사회인리그 X리그 강호 후지쓰 프론티어즈 소속인 송호철, 남규광, 장량욱은 “어떤 상대를 만나도 이길 수 있도록 하겠다”며 “승리를 쟁취하고 말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일본에서도 알아주는 톱 키커 송호철의 합류는 한국의 전력을 극대화시키는 촉매제가 됐다.

“오늘은 선수들이 세게 나설 겁니다.” 백성일 감독 또한 눈빛을 반짝였다. 시나리오의 완성은 승리였다.

◆ 전반 '졸전', 당황한 선수들 

“전반전은 많이 떨어질 겁니다. 후반전에 초점을 맞추는 경기가 될 것입니다.”

박경배 수석코치의 경기 전 전망이다. 그를 비롯한 대다수가 “승패는 의미가 없다. 모든 전략을 테스트해보는 경기”라고 했지만 누구도 대표팀의 패배를 예상하지는 않았다. 현장의 선수들도, 본부석을 메운 임원과 관계자들 모두 이기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상대는 만만치 않았다. 골든 이글스에는 무려 14인의 외국인이 버티고 있었다. 사회인리그 규정상 팀당 외국인 선수 출전이 3명으로 제한되지만 대한미식축구협회는 대표팀의 최종 모의고사이니만큼 외인 전원을 내보내도 무방하도록 조치해 놓은 상태였다.

▲ 골든 이글스의 외국인 선수들은 출중한 개인 기량을 바탕으로 한국 대표팀을 압박했다.

뚜껑을 열어보니 우려스런 장면들이 속출했다. 공격시 펌블이 이어졌고 쿼터백 김태훈의 패스는 상대 수비에 모조리 걸렸다. 수비는 공격보다 더 심각했다. 한번의 롱패스에 허무하게 뚫리며 연이어 점수를 내줬다. 전반전이 끝났을 때 스코어는 0-22였다.

쿼터백 카일 오티스, 러닝백 오스틴 맥코드, 와이드리시버 댄 시게티는 월드컵에서 맞붙을 호주, 프랑스 선수들과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을 만큼 빼어난 기량을 갖췄다. 맥코드는 거친 태클에도 아랑곳 않고 거침없이 전진하며 한국 수비진의 혼을 빼놨다.

백성일 감독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초반 집중력이 크게 떨어졌다. 긴장해서가 아니라 상대를 쉽게 보다가 당한 것”이라고 돌아봤다. 장원석 오펜스 코디네이터는 “대학 선수들의 경우 외국인 선수들을 상대해 본 경험이 없어 이질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평했다.

실전 경험이 부족한 선수들이 당황하는 것은 당연했다. 훈련과 실전은 달랐다. 지난해 쿠웨이트전을 치른 멤버들 중 20여명이 생업, 부상, 가족 때문에 국가대표 유니폼을 벗었다. 파워와 스피드를 두루 갖춘 신장 190cm 이상의 외국인이 공수에 대거 포진한 팀은 절반이 개편된 대표팀에 낯설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가 답답한 나머지 눈시울을 붉힌 김태훈은 “쿼터백으로서 면목이 없다. 동료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디펜스 라인의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며 “준비한 것을 전혀 보여드리지 못했으니 새롭게 마음을 다잡아야겠다. 좋은 공부를 하게 해준 이글스에 감사하다”고 전했다.

▲ 한국은 후반 들어 대반격에 나섰다. 22점차로 뒤진 채 3쿼터를 맞은 한국은 맹추격을 펼치며 20-28로 패했다.

◆ 희망 보인 후반, 대반격은 인상적 

부정적인 요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후반전은 완전히 다른 양상의 경기가 펼쳐졌기 때문이다. 하프타임간 전열을 가다듬은 대표팀은 3쿼터 초반 터치다운을 시작으로 맹추격에 나섰다. 4쿼터 막판에는 20-28까지 스코어를 좁히며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같은 팀이 전후반을 치른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경기력이 월등히 나아졌다.

골든 이글스의 김준호 코디네이터는 “전반전에 실수를 많이 범해 후반전에 극복하기 힘든 스코어가 됐다. 새로운 작전을 테스트하느라 그랬을 것”이라며 “위기를 이겨내고 좋은 내용을 만든데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이번 승부를 통해 문제점이 부각돼 오히려 다행”이라고 말했다.

김성훈은 “평가전을 통해 무엇이 안 되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며 “아쉬움보다는 후반전을 통해 잘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했다. 디펜시브 백 김수돈 역시 “후반에 들어서야 비로소 우리 플레이가 나왔다. 수비를 보완하면 나아질 수 있다고 본다”고 맞장구를 쳤다.

김동희 대한미식축구협회 사무국장은 “덥기로 정평이 나 있는 대구에서 30도가 넘는 더위에 경기를 치러본 것도 도움이 될 것”이라며 “대회가 열리는 미국 캔턴과 비슷한 조건의 기후를 경험해봤다는 점도 큰 장점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 백성일 감독(왼쪽)이 경기 후 선수들에게 지시사항을 전달하고 있다.

백성일 감독은 “투미닛 드릴(경기 종료가 임박한 시점, 끌려가고 있을 때 사용하는 공격법) 때 따라붙은 점, 코디네이터들이 전반에 드러난 문제점을 짚어냈다는 점이 긍정적“이라며 ”초반 터진 잔실수들은 남은 기간 동안 충분히 고칠 수 있다. 쿼터백의 패스 탄도도 점검하겠다“고 약속했다.

경기 후 미팅을 통해 백 감독은 “겁먹지 마라. 후반전 해내는 거 보지 않았냐”고 선수들에게 기를 불어넣었다. 기죽어 있던 선수들은 사령탑의 격려에 어두운 표정을 거두고 우렁차게 외쳤다.

“할 수 있습니다!”

■ 재일교포 구분 말아달라, 한국 미식축구대표팀의 '우리사람' 5인

“재일교포 말고. 우리선수라고 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송호철, 남규광, 장량욱 ‘우리선수’ 3인방이 모였다. 재일교포를 붙잡고 몇 마디 나누던 기자에게 백성일 감독이 이렇게 부탁했다. 셋은 “맞다. 그렇게 나눌 필요가 없다. 우리도 한국인”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남규광은 “누구와 붙어도 이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출사표를 던졌다. 장량욱은 “나이는 어리지만 구애받지 않고 목표를 향해 열심히 뛰겠다”고, 송호철은 “맡은 바 역할에 충실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세 선수는 일본 사회인리그 X리그 강호 후지쓰 프론티어즈 소속이다. X리그는 4부까지 있으며 팀만 50개에 달한다. 한국 우승 클럽은 일본 우승팀에 80점차로 패하는 수준이니 이들의 레벨이 얼마만큼 높은지 가늠할 수 있다. 

키커 송호철은 50야드에 달하는 킥 거리를 자랑한다. 한국의 톱 키커는 기껏해야 30야드를 날린다. 그의 합류에 대해 김용희 스페셜팀 코디네이터는 “킥력이 워낙 좋다. 필드골로 득점하는 루트가 생겼을 뿐만 아니라 디펜스 때도 여유를 확보할 수 있다”고 평가한다. 

정식 스태프는 아니지만 2인의 재일교포가 또 있다. 도우미를 자청한 최경호, 권영수 씨. 

최 씨는 2007, 2011년 월드컵에 키커로 나섰던 선수로 은퇴 후에도 대표팀을 돕고 있다. 권 씨는 오사카 럭비 클럽의 트레이너로 활동하다 최 씨의 권유로 함께 대구를 방문해 선수들을 관리하고 있다. 

유창한 한국어로 통역도 자처하고 있는 이들은 “한국 선수들의 경우 피지컬이 좋아 가능성이 있다”며 “미식축구 선수로서 가져야 할 의식, 훈련간 집중력을 끌어올린다면 발전이 앞당겨질 것”이라고 말했다.

[취재 후기] 움직이는 모든 것이 비용이니 전력분석도, 평가전도 쉽사리 성사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풋볼 DNA를 갖추고 태어난 외인들을 상대하기에는 넘을 수 없는 선천적인 한계가 느껴지는 평가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골든 이글스는 초고효율 최고의 모의고사 상대였다.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 잘 졌다. 오는 10일이면 최종 엔트리가 확정된다. 누구도 다치지 말았으면 한다.

▲ 한국 미식축구대표팀 선수들이 최종평가전 후 단체 촬영을 하고 있다.

sportsfactory@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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