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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Q스페셜] (上) '야구전도사' 이만수의 행복론, 인생2막 헐크는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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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Q스페셜] (上) '야구전도사' 이만수의 행복론, 인생2막 헐크는 웃는다
  • 민기홍 기자
  • 승인 2016.09.15 08: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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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기부-라오스 방문 '봉사 중독'... "월드시리즈 우승 기쁨 열흘, 여기저기서 찾아줘 행복"

[200자 Tips!] 삼성 라이온즈 영구결번(22번). 프로야구 최초 안타, 최초 타점, 최초 홈런(이상 1982년), 최초 100홈런(1986년), 최초 200홈런(1991년), 최초 트리플크라운(1984년), 5년 연속 골든글러브(1983~1987년), 타격왕 1회(1984년), 타점왕 4회(1983~1985, 1987년). 더 이상 이룰 것이 없는 선수 이만수(58)의 커리어다. 야구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걸 누렸지만 그는 "당시의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며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왜일까.

[인천=스포츠Q 글 민기홍·사진 이상민 기자] 2011년 KBO는 프로야구 30주년 레전드 올스타 베스트10을 선정했다. 팬, 야구인, 언론인이 모두 참여한 최고 권위의 투표였다. 이만수는 한대화, 양준혁, 장효조, 김재박, 선동열, 장종훈, 박정태 등을 물리치고 최고의 별로 우뚝 섰다.

▲ 현장에서 물러난 뒤 더 바쁜 삶을 살고 있는 이만수 전 감독. 그는 "주변에서 얼굴이 옛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더라"며 웃었다.

지도자 생활도 화려했다. 2005년 시카고 화이트삭스 불펜코치로 메이저리그(MLB) 월드시리즈 우승을 경험했다. 2007년 SK 와이번스 수석코치로 화려하게 컴백, 스포테인먼트(스포츠+엔터테인먼트)에 앞장섰다. 2012년엔 당시 한국에 여덟 자리뿐이던 1군 감독도 지냈다. 비록 정상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지휘봉을 잡은 첫 해 한국시리즈도 치렀다.

“실력, 인기, 명예, MVP, 돈. 다 가져봤어요. 순간입니다. 월드시리즈 우승 기쁨은 좀 더 가서 열흘 지속되더군요. 그 뒤에는 또 힘든 겁니다. 돈 많으면 잃을 게 많습니다. 기업 회장? 피가 말리는 자리일 겁니다. 내 돈 들여 재능기부를 하니까 행복이 이런 거다 싶어요. 2년간 내 입에서 가장 많이 나온 말이 ‘감사’입니다. 주변에서 얼굴이 옛날 모습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 직함만 6개 "야구로 할 일만 22가지"

“부르는 곳이 많지요. 감독일 땐 거절이 됐는데 지금은 아무 것도 안 하는데 안 가면 안 됩니다. 하하.”

빼곡한 스케줄을 보여주며 활짝 웃는다. 이만수는 자신을 찾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달려간다.

KBO 육성부위원장, 헐크파운데이션 이사장, 라오 브라더스 구단주, 삼성 라이온즈 OB회 회장, 상원고(구 대구상고) 야구인 회장, 서울시 50플러스(+)사업 홍보대사까지 현재 공식 직함만 6개다. 인터뷰 전날 밤에는 상원고 학부모들을 만나 후배들의 미래에 대해 조언했다고.

▲ 이만수는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포수들을 특별 지도하고 있다. [사진=헐크파운데이션 제공]

“2014년 SK 감독직에서 물러날 때 최창원 구단주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제게 묻더라고요. 노트북에 정리한 것들이 있습니다. 야구로만 할 일이 22가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3분의 1 했습니다. 곧 10개는 될 것 같아요. 재능기부, 책 쓰는 것, 해설, 강연, 간증, 야구 아카데미 설립, 라오스 20년 프로젝트 등등입니다.”

이만수는 지난해 전국 곳곳 40군데를 돌아다녔다. 2박 3일에서 길게는 1주일까지 머무르며 학생 야구선수를 가르쳤다. “나는 들렀다 가는 사람이니까 기술 침범은 절대 안 되는데 초중고는 물론 대학교에도 배터리코치가 없다”며 “그래서 얼마든지 가르쳐도 되더라. 직종을 잘 잡은 거다. 평생 이렇게 즐겁게 침범할 수 없는 나만의 영역이 있어 내가 할 일이 많더라”고 미소지었다.

“작년에는 엘리트 쪽만 다닌 것 같네요. 사회인 야구가 결국 야구를 부흥하게 만드는 건데 찾아뵈야죠. 이제는 리틀야구, 여자야구, 티볼하는 학교도 자주 다니려 합니다. 연락이 수시로 와서 참 행복합니다. 나를 찾아주는 사람이 있으니. 그런데 너무 열심히 했나 어깨를 다쳤어요. 야구하고 처음 당하는 어깨 부상입니다. 잘 관리해야지요. 재능기부는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서 놀아주고 이야기해주고 땀 흘리고 운동하면 되는 겁니다.”

서울시는 만 50세부터 64세 세대가 멋진 인생 2막을 여는 활동을 돕는데 혈기왕성한 이만수만한 인물이 없다고 판단, 지난 5월 50플러스(+)사업 홍보대사 자격을 부여했다. 헐크의 진정성을 지켜본 KBO 역시 육성부위원장 직책을 부여, 야구 저변확대를 위한 각종 사업에 그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삼성과 대구상고가 낳은 최고의 스타는 바로 이만수다.

현장을 떠나니 그는 더 바쁜 사람이 됐다.

▲ 이만수 전 감독은 삼성 라이온즈 OB회 회장직도 맡고 있다. 류중일, 박충식, 최익성, 박충식 등 전현직 삼성 레전들이 함께 하는 모임이다. [사진=양준혁야구재단 제공]

◆ 라오스 훈장받는 '야구 전도' 헐크파운데이션 이사장

가장 애정을 쏟는 활동은 라오 브라더스와 헐크파운데이션이다. 2014년 10월 SK 지휘봉을 내려놓고 그는 ‘이제는 승리의 홈런보다 더 값진 나눔의 홈런을 힘껏, 멀리 치겠노라’ 다짐했다.

방송사로부터 해설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그는 '해설은 나중에 할 수 있지만 재능기부는 미뤄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으로 동남아의 라오스로 향했다. 지인의 요청으로 연을 맺은 라오스 어린이들은 지금의 그가 살아가는 힘이다.

“슬리퍼로, 맨발로 놀겠다고 올 정도로 가난한 아이들입니다. 프로야구는 1년이 지나면 유니폼을 모두 버리거든요. 매니저를 불러서 모으라 했어요. 큰 박스로만 5개가 나왔습니다. 라오스로 다 보냈죠. 엄청 클텐데 다 수선해서 입더라고요. 마치 SK 3군 같더라고요. 하하. 제 팬클럽인 '포에버22'에서도 돈을 모아 60벌을 만들어 보냈고요.”

지난해 1월 라오 J브라더스를 창단해 구단주가 됐다. 지난 4월 29일에는 자신의 별명인 ‘헐크’를 간판으로 건 재단을 설립했다. 라오스의 소외 청소년들이 야구를 통해 의욕을 고취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지난달에는 부산국제교류재단의 초청을 받아 친선경기를 치렀고 SK의 배려 속에 특별한 추억도 만들었다. 인천 SK행복드림구장을 찾아 시구·시타, 캐치볼, 배트보이 체험, 주요 시설물 투어도 했다.

▲ 이만수는 라오스 야구에 주춧돌을 놓는다. 라오스 정부는 그의 공을 높이 평가해 훈장을 수여하기로 했다. [사진=헐크파운데이션 제공]

“1904년에 필립 질레트 선교사가 한국에 야구를 전파했습니다. 이렇게 될 줄 알고 했겠습니까. 나는 주춧돌만 놓아주는 역할이지요. 하루 세 끼 먹는 게 꿈이던 친구들이 야구를 통해 희망을 가져요. 한국에 와보고서는 선생님, 정치인, 의사, 사업가 되겠다고 합니다. 20년 프로젝트입니다. 그 때 되면 내가 여든인데. 못 보고 가더라도 후회는 안할 것 같아요.”

“라오스가 사회주의국가라서 처음에는 제 활동에 의심을 했죠. 아이들도 저를 경계했고요. 이제는 야구선수가 장래희망인 친구들이 생겼습니다. 포수 잭은 정말 욕심이 나요. 1년 반 가르쳤는데 블로킹, 송구가 기가 막힙니다 아주. 투수 투유도 조금만 더 시키면 아주 잘할 것 같아요. 한국에 데려와 볼보이라도 시켜보고 싶어요.”

라오스에 야구장 2면, 보조구장 2면, 웨이트트레이닝장, 숙소를 짓는 게 이만수의 꿈이다.

▲ 지난달 28일 인천 SK행복드림구장에서 시타, 시포, 시구자로 나선 라오 브라더스의 뻐 군(왼쪽부터), 이만수 구단주, 투유 군.

라오스의 1,2월 온도는 섭씨 27도. 시차도 한국과 2시간밖에 나지 않는다. 비행기 왕복비용은 20만원 안팎이면 된다. 물가도 부담스럽지 않다. 이만수는 “열악한 환경의 국내 팀이 전지훈련을 라오스로 갈 수 있도록 돕고 싶다”며 “야구장, 숙소를 공짜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 최근 1만2000평의 땅을 보고 왔다”고 귀띔했다.

“봉사하는 사람은 평생 봉사합니다. 한번 발을 들이면 뺄 수가 없어요. 행복하니까. 고사리 손인 어린애들이 안기면 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야구를 계속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니까 지도자까지 파견했어요. 3월에 권영진 감독, 7월에 박종철 감독을 보냈습니다. 민간 외교관이 된 겁니다. 라오스 교육부에서는 훈장을 준다고 오랍니다. 민 기자, 내가 훈장을 다 받습니다.”

▲ 지난 4월 28일 닻을 올린 헐크파운데이션. 정운찬 전 국무총리를 필두로 많은 이들의 이만수의 '착한 행보'에 동행하기로 했다. [사진=헐크파운데이션 제공]

◆ 인복 많아 행복한 사람, '아내 바보' 이만수

“저는 인복이 참 많은 사람입니다. 내가 행정을 뭘 알겠어요. 늘 현장에만 있었는데."

라오 J브라더스는 한국과 라오스의 외교에 큰 역할을 한다. 대한체육회 공적개발원조(ODA) 프로그램을 통해 1600만 원 상당의 야구장비가 전달됐다. 문화체육관광부, 대한야구협회, 라오스 외교부가 나선 사업이다. 이만수는 "MOU(양해각서)도 잘 모르던 나였는데 종로에 라오스 대사관, 성남에 한국국제협력단(KOICA)을 직접 찾아가 일을 했다"고 크게 웃었다.

헐크파운데이션은 박현우, 최형민, 이창희, 이인준, 김현진, 손용준 등 6명의 준비위원과 정운찬 전 국무총리, 이우일 서울대 부총장, 전태원 전 서울대 사범대학 학장, 김대식 한양대 경영대학 교수, 허우영 법무법인 율가 대표, 박금실 전 이화여대 강사, 박수근 현 NBT 대표 등 7인의 이사로 구성됐다.

무보수 재능기부를 하는 선배 이만수의 뜻을 받들어 흔쾌히 도운 후배들도 여럿 있었다. 이제는 병원, 스포츠용품업체, 치킨업체 등이 따뜻한 손길을 내민다.

▲ 모든 재능기부를 사비로 진행하는 이만수. 생활비는 기업 강연으로 번다. [사진=헐크파운데이션 제공]

이 감독은 “사회 나와 처음 배운 게 거절당하는 거였다. ‘알겠습니다’ 하고서는 안 해준다. 나는 사람들이 전부 다 이만수 이만수 하니까 다 될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 웃으며 “6개월을 진정성을 갖고 꾸준히 움직이니 주변에서도 도와주기 시작하더라. 내가 헛되이 살지는 않았구나 싶더라”고 지난 2년을 돌아봤다.

아내 이신화 씨가 이만수 인복의 정점이다. 감독을 그만둔 직후 봉사하는 삶을 살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평생 동반자의 일침이었다. 감독직에서 물러남과 동시에 동유럽을 돌아다니려던 계획은 “퇴임하면 라오스로 건너가 재능기부 하기로 했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느냐”는 아내의 따끔한 한 마디에 물거품이 됐다.

한달 전에는 병원 광고 출연으로 받은 2억 원을 기부했다. 기업 강연으로 생활비를 충당한다는 그는 “전액을 쾌척하겠다고 말했다. 하루만 시간을 달라고 하더니 결국 와이프는 47년간 받은 사랑을 돌려주라고 하더라”며 “아들 둘과 며느리도 동의했다. 내 말이면 다 들어준다. 내가 얼마나 고맙겠나”고 호탕하게 웃었다.

▲ 이만수 전 감독의 아내 이신화 씨(왼쪽). 광고료 전액 기부, 라오스 봉사, 재능기부 등 나누는 삶을 살아가는 건 인생의 배필 덕분이다. 오른쪽은 장남 내외 이하종 씨와 며느리 박미리 씨. [사진=헐크파운데이션 제공]

아내로부터 “앞선 사람이 봉사해야 후배들도 따라온다”는 말을 늘 듣는다는 이만수는 “경제권이 와이프한테 있다. 나는 돈이 얼마나 있는지 어떻게 쓰이는지도 모른다. 생활비가 감독할 때보다 1.5배가 든다더라”며 “10월만큼은 스케줄을 다 비워뒀다. 모처럼 내 가족을 위해 쓰겠다”고 말했다.

아내 자랑이 끝날 줄 모른다.

“자식들한테 그럽니다. 느그 엄마는 평강공주고 나는 바보온달이라고. 여자 잘 만나 장군이 됐습니다 저는. 한양대 1학년 때 만난 캠퍼스 커플입니다. 내가 말수가 적었어요. 헤어지잔 말에 쇼크를 받았는데 책을 보라는 겁니다. 노력 많이했어요. 대구상고, 한양대 때 기자분들 만나면 늘 단답형이었는데 이후로 인터뷰도 한결 나아졌지요. 그 때부터 늘 책을 읽습니다. 내가 책을 많이 보는 사람입니다. 안 그래 보이겠지만 허허.”

▲ 이만수는 "모든 것을 다 이뤄봤지만 기쁨이 오래 가지 않았다"며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SQ스페셜] (下) '노력형 MVP' 이만수가 말하는 이승엽 스윙, SK와이번스 감독 이임식 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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