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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Q인터뷰] 해설가 출신 성공시대 여는 박미희 감독의 '소통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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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Q인터뷰] 해설가 출신 성공시대 여는 박미희 감독의 '소통 리더십'
  • 이세영 기자
  • 승인 2014.11.21 10: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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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줄 배구'로 흥국생명 명가부활 선도...최고의 조련법은 "마음을 이해하는 것"

[300자 Tip!] 프로스포츠에서 해설가로 활동한 뒤 사령탑에 오른 감독 가운데 성공한 감독은 얼마 되지 않는다. 지금은 프로야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해설가로 꼽히는 허구연 해설위원도 1982년 마이크를 처음 잡은 뒤 1986년 청보 핀토스 감독을 맡았지만 성적이 부진해 사령탑에서 물러나야 했다. 같은 현장에 있어도 해설가와 지도자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다르기에 해설위원에게 감독직은 언감생심인 듯 보였다. 하지만 8년간 잡았던 마이크를 놓고 현장으로 복귀한 뒤 단숨에 팀을 선두권에 올려놓은 지도자가 등장했다. 인천 흥국생명 박미희(51) 감독은 중계 부스에서 8년 동안 쌓은 노하우로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 명가 부활을 이끌고 있다.

[용인=스포츠Q 글 이세영·사진 최대성 기자]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는 2005년 V리그가 출범한 뒤 챔프전 우승 3회, 준우승 1회를 달성한 팀이다.

특급 레프트 김연경(26·현 페네르바체)과 라이트 황연주(28·현대건설)를 앞세워 리그를 평정했던 흥국생명은 유난히 외모가 출중한 선수들이 많아 미녀군단이라고도 불렸다.

▲ 박미희 감독은 일명 '거미줄 배구'로 과거 세 차례나 우승컵을 들었던 흥국생명의 부활을 선언했다.

하지만 이들이 다른 팀으로 이적하고 몇몇 주전 선수들이 불미스러운 일로 코트를 떠나면서 흥국생명은 하락세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최근 세 시즌 동안 흥국생명은 최하위권을 맴돌았다. 2011~2012시즌 13승17패로 6개 팀 중 5위에 그친 흥국생명은 그 다음 시즌 6승24패로 5위, 지난 시즌은 7승23패로 최하위에 머물렀다.

매년 곤두박질치는 성적에 흥국생명은 1년에 한 번씩 감독을 교체하며 분위기 쇄신을 꾀했지만 그 누구도 흥국생명의 부활을 이끌지는 못했다. 나아지지 않는 성적과 경기력에 선수들도 지쳐만 갔다.

이때 끈끈한 수비를 강조하는 ‘거미줄 배구’를 전면에 내세우고 팀의 중흥을 선언한 사령탑이 등장했다. 바로 지난 5월 흥국생명 감독으로 선임된 박미희 감독이다. 박 감독은 현재 국내 프로스포츠팀 중 유일한 현역 여성 지도자다.

그는 감독으로 선임된 뒤 V리그 1라운드에서 4승1패를 거두며 단숨에 팀을 선두로 올려놓았다. 박미희 감독이 이끄는 흥국생명의 저력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 해설가와 감독, 180도 다른 직업

그가 감독직을 수락한 계기는 가족의 영향이 컸다. 그동안 자녀들을 키우느라 몇 번의 제의를 고사했던 박 감독은 성인으로 자란 자녀들이 감독직 수락을 놓고 고민할 때 응원해 줘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선수 출신 중에 절반 이상은 지도자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오랫동안 지도자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쉽지 않았지만 그동안 현장에 계속 있었고 마침 기회가 왔지요.”

2010~2011시즌 GS칼텍스 지휘봉을 잡았던 ‘국내 프로스포츠 1호 사령탑’ 조혜정(61) 전 감독의 조언도 큰 힘이 됐다.

“앞서 경험했던 조혜정 감독님도 도전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아직 부족하지만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기에는 아쉬움이 있었지요.”

같은 배구를 다루는 직업이지만 해설가와 지도자의 역할은 완전히 달랐다. 해설가는 그날 준비한 내용을 소화하면 되지만 감독은 팀이 좋은 경기를 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연구해야 한다. 선수들의 상황 하나하나를 알고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해설할 때는 지르기만 하면 돼요. 어떤 편도 아니니 ‘이렇게 하면 좋겠다’는 의견만 제시할 뿐이지요. 특별히 짤 작전도 없고 선수들을 염려할 필요도 없어요. 그저 막연히 ‘선수들이 좋은 경기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하지요. 하지만 감독은 달라요. 감독에게는 많은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을 이끌어야 하는 책임감이 따릅니다. 책임감이 부여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큰 차이가 있지요.”

▲ 박미희 감독은 우승할 수 있는 팀을 만들기 위해 수비를 강화했다. 그의 조련 아래 곽유화, 김혜선, 조송화 등 수비 비중이 높은 선수들의 기량이 급상승했다.

박미희 감독이 한창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던 당시 흥국생명은 내리막길을 타고 있었다. 경기를 지는 것에 익숙하다보니 선수들의 표정이 밝지 않았고 배구에 흥미를 잃었다. 배구를 하면서 성취감을 가져야 하는데 그런 게 없으니 동기부여가 전혀 되지 않았다.

박 감독은 처음 팀에 합류한 뒤 선수들과 이야기를 가장 먼저 시도했다. 그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과 고민들을 모두 듣고자 노력했다.

“제가 처음으로 왔을 때 선수들은 아마 환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지도자가 와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저 사람이 와서 과연 우리가 잘 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했을지도 몰라요. 보이지 않는 벽을 쌓은 선수들에게 제가 먼저 다가가서 이야기를 들어주려 노력했어요. 가정이나 남자친구, 최근에 가지고 있는 고민 등 공감대를 형성할만한 대화를 하다 보니 선수들이 마음을 열었습니다.”

◆ 외부 영입으로 한결 두꺼워진 선수층

박미희 감독은 지난 5월 흥국생명에 들어오자마자 전력보강에 힘썼다. 객관적인 선수구성 상 다른 구단에 밀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현대건설에서 김수지(27)를 자유계약(FA) 선수로 영입한 박 감독은 수비 강화를 위해 곽유화(21)와 신연경(20)을 데려왔다. 신연경은 지난 여름 한국배구연맹(KOVO)컵 때 당한 부상으로 올시즌을 뛸 수 없지만 김수지와 곽유화는 센터와 레프트 자리에서 알토란같은 활약을 펼치고 있다.

김수지는 속공 부문 7위, 블로킹 부문 2위를 달리고 있다. 곽유화는 한층 안정화된 리시브로 팀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특히 팀에서 맏언니인 김수지는 다른 팀에서 막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선수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박 감독은 “주장인 (김)혜진이가 (김)수지와 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혜진이가 수지를 잘 따르고 의지한다. 그만큼 수지는 동생들이 잘 따르는 언니다”라고 말했다.

외국인 선수로는 호주 국가대표 출신 레이첼 루크(26)를 영입했다. 실력도 출중했지만 성실하고 겸손한 자세가 데려오기로 결정한 이유였다.

▲ 박미희 감독(왼쪽)이 훈련 중 외국인 선수 루크에게 지시사항을 전달하고 있다.

“루크를 보려고 호주까지 직접 갔어요. 외국인 선수는 1년 농사를 결정짓는 데 중요한 요소라 꼼꼼히 살폈습니다. 제가 루크를 좋게 본 건 크게 두 가지였어요. 하나는 같이 식사를 하는데 밥을 정말 맛있게 먹더라고요. 한국에서는 음식에 적응하는 게 중요하잖아요. 음식을 가릴 것 같지 않았어요. 또 하나는 훈련을 하는데 멀리 떨어진 공을 주우러 뛰어다니더라고요. 자기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선수가 대부분인데 성실하고 겸손하게 훈련하는 모습에 영입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여기에 올시즌 최고의 신인으로 꼽히고 있는 이재영(18)은 2% 부족한 흥국생명의 공격력을 채워주는 신예다.

올시즌 신인 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흥국생명 유니폼을 입은 이재영은 과감한 공격과 준수한 수비, 날카로운 서브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언니들에게 ‘수훈선수가 되면 무엇을 물어보나요’라고 언론 인터뷰 요령을 물어볼 정도로 스타 기질까지 갖췄다.

졸업반인 선명여고의 전국체전 출전 때문에 아직 V리그에서 많은 경기를 소화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재영의 존재감이 높아질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박 감독은 “국가대표 선수로서 국제대회를 뛰어봤지만 아직 고등학생이다”라며 “지금 뛰는 선수 중에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선수일 뿐이다. 그냥 고등학생으로 바라봐 주셨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승부욕이 강하고 집중력이 높은 부분은 고무적이다”며 “꿈이 크고 포부도 큰 선수”라고 칭찬을 빼놓지 않았다.

▲ 훈련 중 선수들에게 공을 띄워주고 있는 박미희 감독(왼쪽 두번째). 박 감독은 훈련 중에도 선수들과 함께 호흡하기를 원했다.

◆ 최고의 조련, 마음을 이해하는 것

구단 최초로 여성 해설위원 출신 지도자가 된 박미희 감독. 감독직을 수락한 뒤, 1년 전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다 안산 러시인캐시(현 OK저축은행) 사령탑에 오른 김세진(40) 감독에게 많은 조언을 얻었다.

김 감독은 지난 시즌 7개 팀 중 6위로 마친 뒤 올시즌 7승2패로 디펜딩챔피언과 선두를 다투고 있다. 특급 외국인 선수 시몬과 송명근 등 공격력이 업그레이드된 OK저축은행은 막내 구단의 반란을 일으키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박미희 감독은 “지금은 서로 바빠서 연락을 하지 못하지만 처음에 팀을 꾸릴 때 김 감독이 많은 조언을 해줬다”며 “먼저 해설하다 감독으로 갔을 때도 ‘누나도 여자팀에 가야해’라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지금 OK저축은행이 잘 나가는 걸 보니 ‘스타플레이어 출신은 명감독이 될 수 없다’는 말이 틀린 것 같다”고 말했다.

박 감독의 선수 조련법은 특별한 게 없다. 선수의 마음을 최대한 이해하는 게 그의 목표였다. 정말 필요할 때를 빼고는 선수들에게 큰소리를 내지도 않는다.

“윽박지르고 몰아붙여서 될 일이면 그렇게 하겠지만 굳이 그렇게 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격려하고 힘을 실어주려 하는 편이지요. 남성 지도자들은 하기 힘들겠지만 저는 선수들의 엉덩이를 두들겨주며 격려합니다. 선수들과 스킨십은 사소해 보일지 몰라도 중요한 부분입니다. 감독도 선수들과 함께 호흡한다는 것을 선수들에게 일깨워줄 필요가 있습니다.”

▲ 2008~2009시즌 이후 우승 시계가 멈춰있는 흥국생명 선수단은 통산 네 번째 우승반지를 위해 혹독한 훈련을 소화하고 있다.

◆ "배구는 호흡, 지금도 흥국생명으로 숨쉬는 중"

흥국생명. 최근 몇 년 동안 경기 외적인 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일이 많았기에 박미희 감독에게 부담이 됐을 법도 했다. 주위 사람들은 더 잘하는 팀으로 가길 바랐지만 그는 흥국생명 감독직을 새로운 도전이라고 정의내렸다.

박 감독은 “V리그 개막 미디어데이 때 지난 시즌 순위대로 자리를 앉았는데 맨 위 구석에 있어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며 “내년 시즌에는 꼭 앞자리로 가야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말했다.

“흥국생명은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예요. 새로운 도전은 힘든 부분도 있겠지만 설렘도 공존하지요. 결과에 관계없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해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수들이 배구를 하면서 ‘내가 중요한 사람이다’라는 것을 느꼈으면 좋겠어요. 지금 출발을 잘 했으니 리그가 끝났을 때도 성취감과 자부심을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박미희 감독에게 배구는 호흡이다. 사람이 호흡을 하지 않으면 죽는 것처럼 박 감독은 살면서 배구와 호흡을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결혼을 하기 전에는 선수로서, 결혼을 한 뒤에도 학생들과 어머니들을 가르치면서, 또 방송국 카메라 앞에서 배구와 호흡한 박미희 감독은 이제 현장에서 선수들과 함께 배구로 호흡하려 한다.

초보 같지 않은 초보 지도자 박 감독의 첫 시즌이 어떤 결말을 맺을지 사뭇 궁금해진다.

▲ 박미희 감독이 펼칠 '거미줄 배구'가 올시즌 어떤 결실을 맺을지 기대가 모아진다.

[취재후기] 취재를 간 흥국생명의 체육관 내부에는 동기부여가 될 만한 글들이 많이 적혀 있었다. 2008~2009시즌 이후 우승 시계가 멈춰있는 흥국생명 선수단은 통산 네 번째 우승반지를 위해 혹독한 훈련을 소화하며 ‘할 수 있다’는 자기암시를 하고 있다. 박미희 감독은 숙소에 ‘공격을 잘하면 승리하고 수비를 잘하면 우승한다’는 글귀를 적어놨고 선수들은 체육관 한켠에 붙어있는 상황판에 올시즌 자신의 목표를 적은 뒤 우승을 다짐했다. 이전 시즌과 분명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는 흥국생명이 올시즌 일을 낼 것 같은 예감이 든다.

syl015@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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