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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리더십 위기 시대'에 만나는 세종이야기② 백성을 섬긴 어진 임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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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리더십 위기 시대'에 만나는 세종이야기② 백성을 섬긴 어진 임금
  • 유필립 기자
  • 승인 2015.02.28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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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역사는 책에서나 보고 일부러 작정하지 않으면 만나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잠시 주위를 둘러보면 역사는 항상 우리와 마주하며 숨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평소 대중교통 수단으로 오가던 길, 또는 몇 백미터만 더 걸으면 닿을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을 기회가 되는 대로 휴대폰 앵글에 담아 보고자 합니다. 굳이 전문가들에게 역사적 사실을 묻지 않아도 안내판이나 설명서만으로 우리는 꽤 많은 역사적 사실과 지혜, 교훈과 접할 수 있을 듯합니다.

[스포츠Q(큐) 유필립 기자] 세종대왕은 이순신 장군과 더불어 우리 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세종(世宗)'에는 '대왕(大王)'이외에 '성군(聖君)'이라는 칭호가 붙는다.

'대왕'은 '훌륭하고 뛰어난 임금'을 높여 이르는 말이고, '성군'은 '어질고 덕이 뛰어난 임금'을 일컫는다. 세종대왕이 다양한 분야에 걸쳐 탁월한 업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백성을 품는 성품도 남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종대왕은 그 누구보다 백성을 이해한 임금이었다. 600여 년이 흐른 현대에도 적용할 만한 선진적인 생각, 민주주의적 사고를 정책에 반영하기도 했다. 정치·사회적 제한이 많았던 시대에 얼마나 백성의 편에 서서 생각하고 정책에 반영하려 했었는지 고민의 깊이를 읽을 수 있다.

'성군의 고뇌' 세종이야기 전시관에는 백성을 위해 고민하는 듯한 세종대왕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 위대한 성군, 어진 마음으로 백성을 섬기다 

“민생들이 하려고 하는 일을 혼란스럽지 않게 하려고 임금을 세워서 다스리게 했다. 그런데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을 받지 않는다면 어찌 다스리는 체통에 해롭지 않겠는가.”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은 백성이나 하급 관리가 수령의 잘못을 고발하는 것을 금지한 법으로, 1420년(세종 2) 9월 허조(許稠) 등의 건의로 제정되었다.

주요 내용은 수령에 대한 반역죄와 불법살인죄에 대한 고소는 허용하되, 그 밖의 사안은 허용하지 않으며, 죄가 없음이 밝혀질 경우에는 고소자를 처벌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법으로 인해 백성들의 억울함이 늘어가자 세종은 1433년(세종 15)에 부민고소금지법을 개정한다. 백성의 고소를 받아들여 억울함을 들어주되 그 고소로 인해서 수령을 처벌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세종대왕은 백성의 의견을 직접 정책에 반영하기 위해 '전세제도 여론조사'도 실시했다.

전세(田稅)는 논밭에 부과되는 세금이다. 종래의 전세제도는 관리의 부정으로 인하여 농민에게 주는 폐해가 심각하였다. 이에 따라 세종은 백성들에게 부담을 주는 이 제도를 개혁하기 위하며 1430년(세종 12) 3월에 여론조사를 실시하였다.

이때 실시한 여론조사에는 전국 17만여 명의 관원과 백성들이 참여하였으나 제대로 결론을 내지 못하였다. 그러자 1436년(세종 18)에는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를 설치하여 공정한 세금측정을 위한  연구를 거듭하여 드디어 공법을 확정하게 되었다.

'인간 세종' 세종대왕은 시대를 몇 백년이나 앞서간 임금이었다. 전세제도 개편을 위해 여론조사를 실시하고 노비에게까지 출산휴가를 주는 획기적인 정책을 시행했다. 전시관에는 세종대왕이 백성을 위해 펼친 정책을 그림과 함께 소개하고 있다.

◆ 2000년대에도 깨우침 주는 선각자적 시대 정신

세종대왕은 시대를 초월한 인권의식과 서민 복지정책도 펼쳤다. '노비출산휴가제도'와 '결혼 지원제도'는 그 대표적인 정책이었다.

“노비는 비록 천민이나 하늘이 낸 백성이다.”

옛날에는 관가의 노비가 아이를 낳으면 출산 후 7일 이후에 반드시 복무를 해야 했다. 이처럼 사회적으로 매우 열악한 위치에 있는 관노에게 세종은 출산 1개월 전부터 복무를 면제하게 해주는 등 총 130일의 출산휴가를 주었다. 이어서 4년 뒤에는 노비의 남편에게도 1개월간의 휴가를 주었다.

세종대왕은  또 가난으로 혼기를 놓친 자를 안타깝게 여겨 그 내외(內外) 친족으로 하여금 준비를 돕도록 하거나 관청에서 결혼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곤궁한 사람들에게는 관청에서 곡식을 주도록 명하였다.

신분의 귀천을 떠나 노인을 공경하기도 했다.

세종대왕은 천한 노인은 양로연에 나오지 말게 하자는 승정원의 건의를 물리치고, 노인을 공경하는 이유에 대해 ‘노인을 귀하게 여기고 그 높고 낮음을 헤아리는 것이 아니다. 비록 천한 사람이라도 모두 참여하여 즐기게 하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 세종대왕 동상과 그 앞에 설치된 앙부일구 모형.

◆ 과학과 예술 '빛망울, 아 찬란하여라'

세종대왕은 과학과 예술 정책에서도 찬란한 업적을 남겼다. 국가의 농업 진흥에 대한 깊은 관심은 농업에 관련된 천문, 기상, 역법을 위한 각종 기구를 선구적으로 개발하고 실생활에 적용했다. 중국과 다른 조선의 하늘과 땅, 그리고 우리 소리와 음악에 대해서 연구하고 정리했다.

이를 위해 필요한 전문 인력은 신분의 귀천을 넘어 능력 위주로 발굴했다. 과학 발전에 업적을 남긴 장영실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장영실(蔣英實, 생몰일시 불명)은 원나라 사람인 아버지와 기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동래현(東萊縣)의 관노로 있을 때 세종에게 그의 재주를 인정 받아 중국에 파견되었고, 천문기기에 대해 연구하였다.

세종대왕의 지지와 믿음으로 해시계 앙부일구, 물시계 자격루, 자동물시계 옥루(玉漏), 천문관측기구 규표와 간의, 혼천의 등 많은 과학발명품을 제작하였다.

▲ 세종대왕 동상 앞에 있는 측우기 모형.

앙부일구(仰釜日晷)는 1434년(세종 16)에 장영실, 이천 등이 만들었던 해시계로 시계판이 ‘솥을 받쳐 놓은 듯한(仰釜)’ 형상을 하고 있다.

오목한 그릇 형태로 만든 이유는 둥근 지구 모양을 표현한 것이며, 작은 크기로도 효과적으로 시각선, 계절선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문자판에는 한문 대신 12시(時)를 나타내는 12지신 동물의 그림을 그려 넣어 백성들이 시각을 쉽게 알 수 있게 배려했다.

▲ 세종대왕 동상 앞에 있는 혼천의 모형.

1437년(세종 19)에 제작된 '혼상(渾象)'은 오늘날 천구의(天球儀)와 같이 하늘의 별자리를 적도와 황도 좌표의 각도로 둥근 구면 위에 표기하여 별자리의 위치를 살펴볼 수 있도록 한 천문기기이다.

하룻밤 동안 별들의 운행을 살펴볼 수 있도록 만들어 밤의 시간과 절기 변화를 측정할 수 있었다.

▲ 전시관에 있는 혼상(渾象)의 모형.

절대 음감의 소유자, 국악의 기초를 세우다

세종대왕은 편경의 소리를 듣고 음이 틀린 것을 한 번에 알아맞힐 수 있을 정도로 절대 음감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천부적인 감각 때문이었을까? 세종은 조선시대 음악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세종대왕은 1433년(세종 15) 아악 당악 향악을 회례연에서 함께 연주하는 것으로 아악을 새로 제정하여 국악의 기초를 다진다. 또한 전래의 향악 아악 당악 등의 요소를 조화시킨 새로운 음악인 신악(新樂)을 작곡하기도 한다. (*회례연은 설날이나 동짓날에 문무백관이 모여서 임금에게 배례한 후에 베풀던 잔치를 일컬음)

신악에는 ‘정대업’ ‘보태평’ ‘발상’ 등의 곡이 있으며, 신악은 회례아악(會禮雅樂)과는 또 다른 새로운 조선의 음악이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  (*아악은 예전에 우리나라에서 의식 따위에 정식으로 쓰던 음악으로, 고려 예종 때 중국 송나라에서 들여왔던 것을 세종이 박연에게 명하여 새로 완성시켰음. 회례아악은 회례연 때 연주된 아악을 일컬음)

과학에 장영실을 등용하였다면 음악에는 박연(朴堧 1378~1458)을 필두에 등용했다.

1411년(태종 11) 문과에 급제한 박연은 전형적인 문관 집안에서 자랐다. 하지만 1424년(세종 6) 악학별좌(樂學別坐)에 임명 받은 이후에는 오로지 음악을 주관하는 음악 전문가로서 활약하였다.

박연은 정확한 율관으로 음정을 맞춘 편경을 제작하여 조선 초기의 음악을 정비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고, 순(舜) 임금 시대의 유명한 음률가인 기(夔)와 비교되기도 하였다.

박연은 1430년(세종 12) 세종의 명으로 명나라의 ‘율려신서(律呂新書)’를 연구하여, 그 이론을 조선에 맞게 적용하여 아악을 재구성한다.

▲ '축(柷)'은 아악연주에서 시작을 알리는 타악기이다. 나무 방망이를 수직으로 세워 내려치는데, 이것은 하늘과 땅을 열어 음악을 시작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음악의 끝을 알리는 어와 짝을 이룬다. 현재 종묘제례악과 문묘제례악에서 연주된다.

 

▲ '어(敔)'는 아악연주에서 음악의 끝을 장식하는 타악기이다. 끝이 쪼개진 대나무 채로 호랑이 머리를 세 번 치고 등의 톱니를 꼬리 쪽으로 한번 훑어내기를 세 번 반복하는 것으로 음악의 끝을 알린다. 어를 친 후 박을 세 번 울리면 음악은 완전히 끝나게 된다.

 

▲ 편종(編鐘)은 쇠붙이로 된 유율 타악기로 고려 예종 11년(1116)에 송나라로부터 들여와 궁중제례악에 사용하였다. 세종 11년(1429)에는 주종소를 설치하여 국내에서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했다. 열여섯 개의 종을 두 단으로 된 나무틀에 매달아 놓고 연주한다.

 

▲ 편경(編磬)은 돌로 된 유율 타악기로 고려 예종 11년(1116) 송나라로부터 처음 들어와 궁중제례악에 사용하였다. 그 뒤 조선 세종 7년(1425) 경기도 남양에서 경돌이 발견되어 국내에서 제작되기 시작했다. ‘ㄱ’ 자 모양의 돌 열여섯 개를 두 단으로 된 나무틀에 매달아 놓고 연주한다. 경의 두께가 두꺼우면 소리가 높고 얇으면 소리가 낮다.

 

▲ 정간보(井間譜)는 세종 때 소리의 길이와 높이를 정확히 표시하기 위하여 만든 악보다.

세종은 음악을 기록으로 영구히 남기기 위해 특별한 기보 방법인 정간보(井間譜)도 창안했다.

정간보는 한국 음악의 고유한 특성을 담기 위해 탄생된 악보로, ‘井’ 자 모양으로 칸을 질러 놓고 율명(律名)을 기입하였다. (*율명은 십이율(十二律)의 음이름으로, 황종(黃鍾), 대려(大呂), 태주(太簇), 협종(夾鍾), 고선(姑洗), 중려(仲呂), 유빈(蕤賓), 임종(林鍾), 이칙(夷則), 남려(南呂), 무역(無射), 응종(應鍾)을 일컬음)

정간보는 소리의 길이와 높이를 정확히 표시하기 위하여 만들었으며, 정간보의 창제로 인하여 조선 후기까지 종묘제례악이 기록되어 전해져 올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힘의 우위를 기반으로 한 적극적인 군사 정책

세종대왕의 또 다른 위대함은 내치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 굳건한 국가를 건설했다는 점이다.

세종대왕은 치세기간 동안 남방으로는 대마도를 정벌했고 북방으로는 6진을 개척하고 4군을 설치했다. 대외적으로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백성의 안전을 지키고 국가를 방위했다.

대마도 정벌= 1419년(세종 1) 5월 왜선 39척이 비인현에 침입하여 병선을 불태우고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왜구의 침범이 점점 잦아지자 세종은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공략하기로 결정하고, 이종무를 총지휘관으로 임명했다.

이종무는 한 달 뒤인 1419년 6월, 227척의 병선과 군사 1만7000여 명을 이끌어 대마도 정벌에 성공한다.

대마도 정벌 후 대규모의 왜구는 사라졌으며, 이를 통해 조선은 평화 시대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은 수십 년간 계속되던 조선의 근심거리를 제거하고 대일외교의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6진(六鎭) 개척= 조선 초기부터 두만강 하류로 여진족으로 인한 침략과 말썽이 끊이지 않던 곳이었다.

1433년(세종 15) 여진족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자 세종은 김종서를 함길도 도절제사로 임명하고, 적극적인 북진 정책에 나선다.

이듬해 6진(회령, 경원, 온성, 종성, 경흥, 부령)의 설치를 시작으로, 1442년(세종 24) 훈융(訓戎, 경원 북방)에서 독산연대(禿山烟臺, 회령 서방)까지 장성을 쌓고 석막(石幕, 함경북도 북동부에 위치한 부령군의 옛 이름)에 부령부를 설치하여 6진을 완성하였다.

그 뒤 여진족은 서방쪽으로 이주하였고, 세종은 6진에 각도의 백성들을 이주시켜 개척함으로써, 조선의 영역은 장성 밖 일부 지역을 제외한 두만강 이남 전역에 이르게 되었다.

이만주 토벌과 4군(四郡) 설치= 1432년(세종 14) 12월, 오랑캐 추장 이만주가 휘하의 여진족 400여 기(騎)를 이끌고 여연(閭延, 평안북도 자성 지역의 옛 지명) 지역에 침입하여 쑥대밭을 만들었다.

세종은 이 사건을 이용해 여진족을 제압하고 북방 영토를 개척하는 기회로 삼기로 하고 1433년(세종 15) 음력 1월에는 최윤덕(崔潤德)을, 1436년(세종 18) 음력 6월에는 이천을 평안도 도절제사로 삼아 보내어 2차에 걸쳐 야인 소굴인 오라산성(兀刺山城)을 소탕하였다. (*야인(野人)은 조선 시대에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에 거주하던 여진족)

세종은 야인 토벌을 멈추지 않고 북방 영토 개척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4군(여연, 자성, 무창, 우예)이 설치됨으로써 압록강 이남이 완전히 우리 영토가 되었다.

▲ 신기전(神機箭)과 화차(火車)

세계 최고 수준의 로켓 무기를 제작하다

세종대왕은 군사력 강화를 위해 신형 무기의 개발에도 힘을 쏟았다.

신기전은 1448년(세종 30)에 만들어진 화살로, 화약통이 달려 있어 연기를 내며 멀리 발사되는 것이 특징이다.

1474년(성종 5)에 간행된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의 병기도설(兵器圖說)에 따르면 신기전의 종류는 크기에 따라 대(大)신기전, 중(中)신기전, 소(小)신기전, 대신기전과 비슷한 규모의 산화(散火) 신기전 등 모두 4가지였다.

화차는 1451년(문종1)에 개발되어 한 번에 100발씩 쏠 수 있도록 개량되었고, 각도를 조절하여 사정거리도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로켓 무기를 제작한 조선시대의 뛰어난 기술력을 보여주고 있다.

◆ 조선 건국 후 세대인 '서울 토박이 임금'

▲ 도성대지도(都城大地圖)를 통해 본 세종대왕 생가. 도성대지도는 18세기 서울의 모습을 진경산수화풍으로 그린 지도로, 현존하는 도성도 중에서 가장 큰 규모다.

세종은 1397년(태조 6) 음력 4월 10일에 한양 준수방, 지금의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 근처(지금의 서울 통인동 137번지 일대로 추정)에서 태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세종은 조선 건국 후 세대로 서울을 고향으로 둔 ‘서울 토박이 임금’이었다.

<세종대왕 인물정보> 

- 이름 : 이도(李祹)

- 자 : 원정(元正)

- 칭호 : 세종대왕(世宗大王)

- 출생지 : 한양 준수방(현재의 서울특별시 통인동 경복궁 영추문 근처)

- 생년월일 : 1397년 4월 10일(음력) / 5월 15일(양력) (~1450년 2월 17일)

- 재위기간 : 1418년 8월~1450년 2월 (31년 6개월)

- 가족관계

   * 아버지 : 태종(太宗) 이방원

   * 어머니 :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

   * 왕 비 :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

   * 자 녀 : 조선 제 5대왕 문종 등 18남 4녀

- 취미 : 공부, 독서

- 성격 : 이지적이며 실리주의적임. 때로는 과단성이 있어 지도력을 발휘.

- 특이 사항 : 높은 학구열, 바르고도 영민한 판단력

- 특기 : 절대 음감의 소유자 (편경의 소리를 듣고 음이 틀린 것을 한 번에 알아맞힐 수 있음)

- 신체사항 : 의젓하고 당당한 풍채, 지나친 독서로 인한 눈병

- 좋아하는 음식 : 고기, 앵두

- 좋아하는 운동 : 무예 습득과 건강 증진을 위한 격구와 강무

- 세부 능력 : 과학, 음악, 서화 등 분야를 막론하고 두루 정통함.

                 토론을 좋아하며 남의 말을 잘 경청함.

                                                                           [자료 출처= 세종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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