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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 명가를 찾아서] (7) 구리여고 유쾌한 노젓기, 봄볕도 시샘하는 황금 물보라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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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 명가를 찾아서] (7) 구리여고 유쾌한 노젓기, 봄볕도 시샘하는 황금 물보라 (上)
  • 박상현 기자
  • 승인 2015.05.01 10: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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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 전통 여고카누 명문…선수 숫자 줄었지만 최강 자존심 위해 구슬땀

[300자 Tip!] 쭉 뻗은 수로 위에 날렵한 배, 그리고 노를 젓는 구릿빛 팔뚝. 경기도 하남시 조정경기장만 가면 언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노와 부딪힌 물방울은 한껏 따가워진 봄 햇살에 보석처럼 반짝거린다. 선수들의 눈동자 역시 물보라처럼 빛난다. 바로 이 장소에서 한국 카누는 지난해 아시안게임에서 귀중한 금메달을 따냈다. 1990년 베이징대회 이후 무려 24년 만에 나온 금메달이었다. 그리고 당시 아시안게임 금메달에 환호했던 여고생들은 내일의 자신을 상상하며 힘차게 노를 젓는다. 카누 명문 구리여고의 훈련 현장을 찾았다.

[하남=스포츠Q 글 박상현·사진 최대성 기자] 겨우내 움츠러들었다가 갑작스럽게 따사로워진 날씨에 봄볕을 무심코 맞았다간 자신도 모르게 까맣게 그을리게 된다. 오죽하면 '봄볕에 며느리를 내보내고 가을볕에 딸을 내보낸다'는 옛말까지 있을까. 며느리보다 딸을 더 아끼고 위하는 시부모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봄볕에 그을면 보던 님도 몰라본다'는 말도 있다.

▲ 구리여고 3학년 박한비(왼쪽)와 김지은이 하남 미사리 조정경기장에서 마치 마법빗자루에 올라탄 것과 같은 포즈를 취하며 즐거워하고 있다.

하남시 미사리 조정경기장에 모여든 다섯 여고생들은 이런 봄볕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긴 하지만 그래도 태양을 피할 수는 없다. 봄볕에 그을리는 것은 이들의 숙명이다. 올해 졸업반인 박한비(18)는 "벌써 팔뚝 위쪽과 아래쪽의 색깔이 다르다"며 입을 삐죽거렸다. 자세히 살펴보니 위쪽은 아직 하얗지만 아래쪽은 이미 그을러 벌써 까맣게 됐다.

원래 구리여고 선수는 6명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신입생 김채윤(16)이 왼쪽 발 부상으로 재활치료를 받고 있어 훈련에 함께 하지 못했다.

◆ 24년 전통, 구리여중과 연계돼 최강 여고팀 성장

구리여고 카누팀은 경기도뿐 아니라 국내 최고의 전력을 자랑한다. 대선배 임수미는 1993년 대한카누연맹이 선정한 여자카누 최우수선수로 뽑혔고 이듬해인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의 여자 4인승 종목에 출전하기도 했다.

1991년 창단돼 어느덧 24년째를 맞고 있는 구리여고가 카누 명문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은 구리여중과 연계 육성 시스템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김채윤, 이예린, 이슬이, 최유슬(이상 16) 등 현재 1학년생 4명 선수 모두 구리여중을 나왔다. 구리여중 역시 지난해 10월 충주 탄금호 국제조정경기장에서 벌어졌던 전국선수권 여중부 경기에서 금메달 2개와 은메달 1개, 동메달 2개를 따내는 등 여중 최강으로 자리하고 있다.

▲ 여고 카누 명문 구리여고의 훈련은 달리기로 시작된다. 하남 미사리 조정경기장 3km 코스를 달리고 나면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된다.

지난해 청소년 대표로도 선발됐던 최유슬은 오빠인 최명재(와부고 3학년)가 시작한 카누가 너무 멋있어 보여 입문한 경우다. 최유슬은 "오빠의 경기를 봤는데 너무 멋졌다. 멋있게 보여서 카누를  하게 해달라고 졸랐다"며 "막상 해보니까 재밌다. 카누는 내 운명인 것 같다"고 까르르 웃었다.

이예린은 "중1때 체육 선생님이 카누를 해볼 생각이 없느냐고 제의해주셨다"며 "어머니도 적극 추천해서 구리여중으로 와 카누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슬이 역시 체육시간에 카누팀 감독님이 권유를 해 시작했다.

이들보다 2년 선배인 박한비와 김지은(이상 18)은 약간 늦게 시작했다. 김지은은 의정부여고에서 1학년까지 육상을 했다. 그러나 2학년에 때 왼쪽 무릎 아래가 골절되면서 육상을 접었다.

김지은은 "육상을 그만 둔 뒤 한 달 동안 집에만 박혀 있었다. 수업을 가도 1, 2교시만 듣고 집에 오기 일쑤였다"며 "운동을 너무 하고 싶어서 인터넷을 검색하다보니 카누를 발견하게 됐고 구리여고 한동우(45) 코치님을 찾아가 면접을 봤다"고 회상했다.

김지은은 지난해 7월부터 노를 잡았다. 카누를 너무 늦게 시작한 케이스지만 그래도 운동을 했었기 때문에 금방 균형 감각을 잡았다. 보통 완전히 밸런스를 잡기까지 5~6개월 정도가 걸리지만 김지은은 3주만에 노를 젓기 시작했다. 우울증까지 걸렸던 그에게 카누는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 이예린이 하남 미사리 조정경기장에서 훈련하기 직전 창고에서 자신의 카누배를 꺼내 어깨에 짊어지고 가고 있다.

◆ 금메달 사냥꾼 구리여고, 올 들어 걱정이 늘어난 이유는

카누 경력이 가장 오래된 박한비는 중2 때부터 시작했다. 174cm의 남다른 신체조건을 눈여겨본 고모부 정종환 대전시체육회 카누 감독의 추천을 받았다. 힘든 운동을 왜 하려느냐는 어머니의 반대가 있긴 했지만 전북 정읍에서 구리로 건너와 노를 잡았다.

박한비에게 같은 학교 친구들이 카누팀에 붙여주는 별명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금메달 사냥꾼"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실제로 구리여고는 2013년 전국체전 카누 여고부에서 4개 가운데 3개의 금메달을 휩쓸었다. 당시 박한비는 1학년생이었고 졸업반 언니 이진화(20·속초시청), 김소연(20·한국체대)과 2학년생 김혜원(19·속초시청)이 함께 이뤄낸 결과였다.

그러나 한동우 코치는 요즘 고민이 많다. 1995년부터 20년째 구리여고를 지도하고 있는 한 코치는 "지난해 에이스인 김혜원이 졸업하면서 뛸 선수가 많지 않다"고 토로한다.

선수 구성을 보면 3학년생 2명에 1학년생이 4명이다. 카누는 1인승과 2인승, 4인승이 있는데 선수가 여섯이어서 한 선수가 두 종목 이상을 뛰어야 한다. 두 종목을 뛰는 것은 가능하지만 힘에 부칠 수 밖에 없다. 지난해보다 성적이 떨어질 것이 우려된다. 성적 하락은 대학 진학이나 실업팀으로 가야 하는 고교팀으로선 치명적이다.

▲ 이예린(왼쪽)과 최유슬이 하남 미사리 조정경기장에서 본격적인 훈련을 하기 직전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한동우 코치는 "성적이 정말 좋은 선수만 인근에 있는 한국체대에 간다. 한국체대는 심사 기준이 워낙 까다로워서 뽑히기가 쉽지 않다"며 "동국대는 여자 선수 선발이 확정되지 않았고 한국해양대는 부산 출신 선수가 우선이어서 가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또 한 코치는 "실업팀에 가는 것도 방법이지만 국내에 카누 실업팀이 많지 않은 것도 문제"라며 "3학년생 선수들이 바짝 성적을 끌어올려주고 1학년생이 언니들을 잘 받쳐준다면 명문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성적을 올릴 수 있을 것 같다"고 밝혔다.

◆ '2층집 동우오빠'와 여고생들의 유쾌한 카누부 만들기

한동우 코치는 선수들에게 체력훈련을 강하게 시킨다. 3km 달리기로 몸을 푼 뒤에는 카누를 타고 물에 들어가 2시간 가량 뭍에 나오지 않는다. 그저 열심히 노를 저을 뿐이다. 선수들은 "훈련이 너무 힘들다"고 고개를 흔든다.

이런 지옥훈련에도 코치와 선수들의 사이는 너무나 좋다. 선수들은 한동우 코치를 '2층에 사는 동우 오빠'라고 부른단다. 구리여고 코치 숙소가 2층에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아빠뻘 되는 코치에게 '오빠'라고 부를 정도이니 사제지간이 얼마나 돈독한지 알 수 있다.

박한비는 '우동 한그릇'이라는 별명도 있다며 한동우 코치에게 살짝 안긴다. 한 코치의 이름을 거꾸로 부른 별명이다. 이런 별명에도 한 코치는 허허 웃는다. 자상한 아빠, 아니 오빠가 따로 없다.

▲ 구리여고 카누팀 선수들이 하남 미사리 조정경기장에서 힘차게 물살을 가르고 있다. 구리여고는 1991년 창단돼 한국 여자 카누를 이끌어온 여고 명문이다.

따가운 봄 햇볕에 살은 계속 그을리지만 이들은 유쾌하게 카누를 탄다. 힘들지만 늘 웃는다. 카누를 타면서 일종의 직업병(?) 같은 것이 없느냐는 질문에 "전신 운동이어서 어깨, 허리, 발에 걸쳐 안아픈 곳이 없다"며 "그래도 가장 힘든 것은 하루종일 배에 앉아있어서 엉덩이가 짓무르는 것"이라고 토로한다. 자주 물과 닿기 때문에 무좀 같은 병은 없느냐고 살짝 물었더니 "어머, 그런 것 없어요"라며 거침없이 양말을 벗어보인다. 정말 유쾌한 여고생이 따로 없다.

마침 구리여고 카누부를 취재한 날은 영화 어벤져스의 배우들이 '어벤져스 어셈블' 레드카페 행사가 열린 날이었다. 사진기자가 다음 일정으로 이 이벤트를 취재한다고 하자 "우와, 좋겠다. 나도 로다주(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노를 놓지 않았다.

"그래도 카누 열심히 해야죠. 카누로 성공하고 싶으니까요."

[취재후기] 이들은 지난해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카누가 금메달을 따는 모습을 보면서 함께 환호성을 질렀다. 이구동성으로 "우리도 열심히 하면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딸 수 있겠죠"라며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얘기했다. 금메달에 감동받고 동기부여가 됐다는 것이 그들의 설명이었다. 사실 한국 카누는 아시아에서도 중상위권에 그쳐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 무대에서 명함을 내밀기가 모자란 전력이다. 그러나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없는 것이 스포츠 아니던가. 이들이 아시아 무대 또는 세계 무대에서 환하게 웃을 날을 기대한다.

▲ 구리여고 카누팀을 함께 이끌어가고 있는 김지은(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한동우 코치, 박한비, 이예린, 최유슬, 이슬이가 하남 미사리 조정경기장에서 훈련 시작 전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아마추어 명가를 찾아서] (7) 구릿빛 피부라서 더 아름다운 구리여고 카누어들(下) 로 이어집니다.

tankpark@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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